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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내게 기대며 상처 주는 가족, 연인…‘선긋기’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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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

⑤ 홀로 떠안는 ‘거부 민감성’ 성격



어려움 딛고 배우로 성공한 민희씨

무리하게 생활비 요구한 가족들

남자친구 집착도 거절 힘들어해

암담한 상황에 죽고 싶다 생각도


한겨레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야 하고 남에게 싫은 이야기를 못하는 ‘거부 민감성’ 성격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 상실의 트라우마는 혼자 고립되어서 해결되지 않고, 새로운 사람과 만남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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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가족과 관련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은 노력을 통해 성공해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했지만 나머지 가족에게는 경제적 능력이 없습니다. 가족들은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자립하기보다는 성공한 사람에게 경제적, 심리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편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만약 충분한 도움을 주지 않고 가족과 단절하려고 하면 큰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25살 민희씨는 어린 시절 꿈이었던 연예인으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짙은 어둠이 늘 자리잡고 있습니다.

돈 요구하는 가족, 집착하는 남친


민희씨의 부모님은 민희씨가 초등학교 때 이혼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세 자녀를 남기고 집을 떠났습니다. 큰딸이었던 민희씨는 어머니와 함께 두 동생을 보살피며 살았습니다. 어린 민희씨는 아버지가 떠나간 것이 자기 때문이 아닌지 늘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어머니마저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자주 들었습니다. 민희씨는 모범생으로서 열심히 학교를 다니며 공부에 전력했습니다. 하지만 집안은 경제적으로 점점 더 어려워져 공부를 잘했음에도 대학에 진학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때 길에서 우연히 만난 기획사 대표를 통해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민희씨는 뭔가 어두운 구석이 있는 얼굴이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배우로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민희씨는 유명해졌지만 아직 돈을 많이 버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민희씨를 보며 민희씨가 돈을 무척 많이 벌 것으로 생각하고 수시로 금전적인 도움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민희씨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쓰는 카드 값을 대신 내주었는데 이 비용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수입의 대부분을 가족의 카드 값을 내는 데 쓰게 되었습니다. 꼭 필요한 것을 샀는지 물어보면 가족들은 화를 내며 민희씨에게 ‘성공하더니 건방져졌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했습니다. 민희씨는 이 문제를 누구에게 상의할 수도 없었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날을 울기도 했습니다. 공허함과 죄책감은 점점 깊어져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민희씨는 한 작품에 같이 출연한 무명 배우 태영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남자다워 보였고 함께 있으면 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몇달째 만남을 이어가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스케줄로 태영씨와의 저녁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습니다. 민희씨가 전화를 해서 약속을 취소하려고 하자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겠다며 민희씨의 집 앞에 찾아오겠다고 했습니다. 태영씨는 일이 없어서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주로 민희씨에게 연락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일과의 대부분이었습니다. 민희씨는 이런 그가 너무 부담스러워 그만 만나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의 처지가 안쓰럽고 자신을 아껴주는 것 같아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날 결국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습니다. 남동생이 카드로 수백만원이 넘는 돈을 썼고 민희씨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희씨가 전화로 동생에게 야단치며 그 돈은 절대 내줄 수 없다고 하자, 어머니가 전화기를 낚아채 동생에게 그렇게 대하면 되느냐며 민희씨에게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민희씨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울한 기분과 의욕 저하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으로는 계속 태영씨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나 화났어, 빨리 어디 있는지 답장해!” 민희씨는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암담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가족 두고 떠난 아버지

내 잘못인가 자책이 트라우마로

가족·주변인 관계에 원칙 세우고

‘안전지대’ 될 편한 사람 찾아야



‘누군가 상처 입을까’ 거절도 못해


어린 시절 경험은 그 사람의 대인관계 양상에 큰 영향을 줍니다. 어릴 적 부모와의 이별은 상실의 고통을 가져옵니다. 그 고통에 대응하는 방법은 타고난 성격이나 연령대에 따라 다릅니다. 민희씨처럼 자신 때문에 부모가 이별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자신을 버렸다며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부모가 이혼하게 된 것은 민희씨와는 관련이 없었지만 민희씨는 어린 마음에 자신이 공부를 열심히 안 하고 부모님의 속을 썩였던 것이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오랜 기간 생각해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민희씨에게 ‘거부 민감성’이 강한 성격이 형성되었습니다. ‘거부 민감성’이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야 하고 누구에게든 싫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성향입니다. 연예인으로서 대중의 인기를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 성격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들은 어린 나이에 성공한 민희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민희씨는 이 상황이 무척 부담스럽지만 자신이 싫은 내색을 보일 때 정색하면서 화를 내는 가족들을 보면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떠올라 거절하지 못합니다. 그럴수록 가족들은 민희씨가 성공한 것이 자신들이 도와줬기 때문이며, 자신들이 민희씨에게 요구하는 그 모든 것이 정당하다고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민희씨의 이런 성격은 태영씨와의 만남에서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태영씨는 집착이 심하고 진정으로 민희씨를 위해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성공한 민희씨를 만나는 것을 자신의 자존심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민희씨는 그 집착을 거절하지 못하고 계속 끌려가기만 합니다. 결국 자신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안심할 수 있는 ‘안전기지’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존감 형성에 있어 어린 시절 안전기지의 형성과 ‘적당한 좌절’의 경험이 중요한 근간이 됩니다. 이 안전기지와 적당한 좌절 모두 부모님이 그 역할을 하게 되지만 다른 보호자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애착 이론’으로 유명한 영국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존 볼비의 ‘낯선 상황 실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실험에서 볼비는 14개월 된 아기와 엄마를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아기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조용히 방을 나가면 아기는 패닉 상태가 되어 장난감은 가지고 놀지 않고 엄마를 찾으며 울게 됩니다. 엄마가 다시 방에 들어와 아기를 안으면 아기는 안정을 되찾은 뒤에 비로소 다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아기는 엄마에게 애착이 형성되어 있고 엄마는 아이를 위한 안전기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안전기지가 없다면 커가면서도 세상을 탐구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은 상태로 항상 예민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애착이 서로 형성되지 않는다면 안전기지는 형성되지 않으며, 평생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됩니다.

민희씨는 먼저 가족이나 태영씨와의 상황을 ‘구조화’해야 합니다. 여기서 구조화란 금전적인 부분, 연락 방법, 만나는 방법 등에 대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한도를 정해 그 이상은 불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연락을 하는 시간도 정해두고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오는 연락으로 민희씨가 피곤해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만나는 방법도 정해서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구조화하게 되면 처음에는 가족이나 태영씨가 민희씨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민희씨가 정한 구조에 맞춰갈 수밖에 없습니다. 태영씨의 경우 민희씨의 원칙을 따르지 않거나 다른 문제를 만들면 과감하게 단절하는 것이 자신이나 태영씨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관계 원칙 세우고, 편한 사람 찾아야


민희씨는 너무 큰 부담을 느껴 우울한 기분과 수면장애, 의욕 저하 등 우울증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우울증이 나타나면 자신의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과거에 있었던 트라우마들이 자신을 사로잡게 되고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울증에 의해 자신의 생각 속에 갇히게 되면 집 밖에도 나가지 않게 됩니다. 온종일 누워 있는데 그럴수록 생각은 더 복잡해집니다. 이때는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서 우울증에 대해서 상담과 치료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도움을 받으면서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일상을 다시 시작할 힘을 얻게 됩니다.

치료를 받는 중에 담당 의사와 가족들을 만나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가족들은 민희씨가 가지고 있는 오랜 상실의 트라우마를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민희씨와 소통할 때 책임감이나 거부 민감성을 자극해 자신의 요구를 달성하려고 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민희씨가 우울증이 지속되어 연예인 활동을 하지 못하면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민희씨도 스스로 구조화하고 가족이지만 분명한 선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가족들을 자립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가족들의 처지가 안타깝지만 그들도 스스로 절약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민희씨는 가족이나 태영씨를 통해 안전기지를 형성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안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나 대상을 찾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연예인 생활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상실의 트라우마는 혼자 집에서 고립되어서는 해결되지 않으며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치유될 수 있습니다.

▶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의 지은이 전홍진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예민한 사람과 둔감한 사람에 관해 설명합니다. 매우 예민하다는 것은 ‘외부 자극의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고 자극적인 환경에 쉽게 압도당하는 민감한 신경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모두 가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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