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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데스크 칼럼] 당신을 위한 나이지리아 왕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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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1990년대. 나이지리아 왕자(Nigerian prince)가 미국 사회에 등장했다. 왕자는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진 정쟁 탓에 해외로 망명해야 하는데, 국외로 막대한 재산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해외 조력자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왕자의 안타까운 소식에 미국인들은 너도나도 파트너를 자처했다. 이들은 파트너가 되어주면 다음에 큰돈으로 보상하겠다는 왕자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왕자는 없었다. 얼마 후 사기 혐의로 체포된 왕자는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사는 백인 남성이었다.

나이지리아 왕자는 체포됐지만, 그의 유산은 살아남았다. 다만 왕자에서 리비아 공주, 혹은 사우디의 귀족으로 사연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도와주는 이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스위스 은행에 수십억달러가 예치돼 있는데 스위스에 갈 돈이 없다. 만약 비행기표를 사주면 수십 배로 갚겠다’고 했다. 최근에는 국내 암호화폐 시장에도 이러한 사기꾼들이 등장했다. 사기꾼들은 암호화폐를 자신들에게 보내주면 이를 몇배로 되돌려 준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잘 속지 않는 편이라고 해서 안심하긴 이르다. ‘펌프 앤 덤프(pump and dump)’ 사기는 국내외 금융시장에서 늘 기승을 부려왔다. 이 유형의 사기꾼들은 헐값에 매입 가능한 주식을 대량으로 사 모으고 나서 허위 정보를 유포시켜 가격을 끌어올린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투자자들도 가격이 치솟기 시작하면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매수 대열에 합류한다. 자연스레 가격 상승 곡선은 가팔라지고, 꾼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보유 물량을 팔아 치운다.

요즘 해외에서는 중국 암호화폐 시바 이누(Shiba Inu)를 두고 펌프 앤 덤프 논쟁이 격렬하다. 이 암호화폐는 시바견을 마스코트로 사용하는 도지코인(Dogecoin)을 본뜬 정체불명의 코인인데, 수일 만에 수조원의 자금이 몰려들었고 일주일 남짓 되는 기간에 2000% 이상 급등했다.

최근 시바 이누나 국내 정치 테마주를 보고 있자면 30년 전 중국 만리장성 관련주가 생각난다. 30년 전 투자자들은 만리장성에 바람막이 공사를 하는데 인부들이 먹을 간식으로 국내산 호빵이 선정됐고, 호빵을 먹다 체하면 소화제가 필요하다는 소문을 듣고 관련주에 올인했다. 실체가 없던 것에 뛰어들었던 이들의 결말은 처참했다. 당시 만리장성 테마주는 전형적인 펌프 앤 덤프 공식을 따라 움직였다.

사기를 당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피해자다. 피해자들은 분노해야지, 피해당한 사실에 대해 자책할 필요는 없다. 다만 투자 판에서 깨지는 사람들은 공통된 속성이 몇 가지 있다. 객관적인 자료들을 무시하는 행동, 예를 들면 ‘사기가 사실은 사기가 아니다’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 혹은 ‘나보다 바보는 항상 존재한다’는 일종의 착각이다. 한발 더 나아가면 ‘나만은 남들과 다르다’는 선민의식도 필패에 한몫하곤 한다. ‘설거지물은 결국 한강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격언도 이들 앞에서는 그저 남의 얘기다.

예전부터 탐욕이 넘치는 곳에는 늘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과, 오매불망 투기꾼만을 기다리는 사기꾼이 공생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안타깝게도 투기꾼보다 사기꾼들이 전문적인 경우가 많았다. 불편한 얘기지만, 여전히 나이지리아 왕자는 연간 수백만 달러의 돈을 벌어들인다.

이런 사실이 말해주듯 앞으로도 사기꾼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공산이 크다. 특히 사기꾼들은 불확실한 시대에 활개를 친다. 팬데믹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다. 이길 수 없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투자 판에서 지나친 탐욕과 객기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하진수 금융증권부장(hjs@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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