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68145688 0362021051568145688 02 0201001 society 7.0.0-HOTFIX 36 한국일보 0 false true false false 1621020600000

[젠더살롱] '겸자' 든 남성, 여성 산파를 내쫓다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8> 산파 쇠락의 역사와 여성 노동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국일보

스페인 화가 레오폴도 그라시아 라몬의 1902년작 '목욕'. 발렌시아 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크다. 남성이 100만 원을 벌 때 여성은 67만 원을 번다. 같은 직종에서 같은 노동을 해도 여성은 적게 번다. 여성이 많은 직종은 저평가되는 경향도 있다. 여성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직종을 떠올려보라. 그 분야는 남성 비율이 높은 동종업계의 다른 직종에 비해 저임금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연봉이 높은 직종에 여성이 진입하기 시작하면 해당 분야의 평균 임금이 떨어지는 현상도 있다.

여성이 많은 분야가 저임금인 이유는 그 직업이 실제로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성의 노동이 저평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정 직종이 ‘돈이 되기’ 시작하면 남성이 진출하여 여성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과정이 역사적으로 꽤 자주 반복되어왔다. 그중 한 예로 출산에 관한 전문성의 영역에서 여성이 밀려난 역사를 소개한다.
한국일보

산파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며 출산은 오랫동안 여성이 전문성을 독점한 영역이었다. 사진은 출산 장면을 묘사한 고대 로마 조각. Wellcome Collection Gallery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7세기까지 여성이 독점한 전문직, 산파


산파 혹은 조산사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다. 산파는 오랜 기간 여성 건강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는 출산 분야의 기술을 개발하고, 혁신하고, 전문성을 독점해왔다. 산파의 영어 이름인 ‘midwife’는 함께(with)를 뜻하는 mid와 여성(woman)을 의미하는 wife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곧 산파는 with-woman, 함께 있는 여성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산파는 역사적으로 여성이었고 가족 구성원이나 이웃 주민이 출산할 때 함께 있으며 도움을 주었고 출산에 관련한 여러 가지 폭넓은 지식을 가진 전문직이었다. 무엇보다 산파는 여성이 결혼한 뒤에도, 나이를 먹은 뒤에도, 과부가 된 이후에도 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돈벌이 중 하나였다.

17세기까지 유럽 사회에서 산파는 출산 분야를 독점했고 왕실에서 후계자가 태어날 때도 노련한 산파가 도왔다. 당시 다른 의료계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산파는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전문적인 교육기관은 없었지만 직업상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독학이나 도제 생활을 통해 익혔다.

산파술은 여성의 전문 영역이었으나 16세기 무렵 남성 산파가 등장한 이후 두 세기에 걸쳐 산파와 남성 의사가 누가 출산이라는 분야를 차지할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툰다. 1550년 이전에는 남성 의료인과 산파가 평화롭게 공존했다. 17·18세기가 되면서 수공업으로 여겨졌던 전통적인 분야가 전문화되며 긴장이 고조됐다. 의료분야에 종사하던 남성은 길드 같은 단체를 조직하며 자신이 몸담은 분야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전문성을 획득해갔다.

가령 1731년에는 프랑스 왕립 외과 아카데미가, 1800년에는 런던 외과대학이 설립되며 외과 의사의 지위는 대학 교육을 받은 내과 의사와 비슷해졌다. 약사, 치과 의사, 수의사 등도 18세기를 지나며 전문직으로 거듭났다(이들이 지닌 전문성이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쟁취해낸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산파는 다른 길을 걷는다. 왜? 첫째로 여성 산파는 자율적으로 조직을 만들 수 없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조직을 구성할 권리를 갖지 못했고 대학에 들어갈 수도, 대학을 세울 수도 없었으며 도리어 남성 관료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둘째로 이 분야에 남성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출산에 남성이 참여하는 것은 모욕적인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계급의 출산을 도와주는 남성이 처음 등장한 이후 16세기 후반부터 산파술을 시행하는 남성이 생겨났다. 이후 귀족이 아닌 중산층도 이 선례를 따르면서 1760년대가 되자 상인과 장인 계층까지 남성 산파를 선택하기 시작했다(Donnison, 1977).

남성이 출산 분야에 진출하자 그제야 산파 역시 전문직으로 변하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여성 산파는 전통적 방식을 사용하며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산파술에 관한 선진 지식과 기술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과거 남성 산과의사가 사용했던 겸자. 겸자는 여성이 전문 영역이었던 산파술에서 여성을 내모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여성은 겸자와 같은 외과도구를 사용할 수 없었고 선진 지식에도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모형은 이탈리아 피렌체 갈릴레오박물관 소장. 하미나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남성만 사용할 수 있었던 '겸자'


남성 산파는 자신들이 ‘겸자’라는 도구를 사용해 산모의 고통을 줄여주고, 출산과정에 더 정교하게 접근한다며 여성 산파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겸자는 가위 모양으로 생겼으나 날이 없는 외과 수술 도구로, 분만할 때 겸자를 산모의 질 안에 넣어 아기 머리를 잡아 꺼내는 데 쓰였다. 겸자가 개발되자 분만은 빨라졌지만, 산모나 아이가 죽는 일도 있었다.

겸자는 여성을 산파술에서 내모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외과 의사만 외과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고, 이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여성 산파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여성은 외과 도구를 사용할 수 없었다).

여성 산파는 조직을 구성할 권리도, 교육을 받을 기회도 박탈당한 채로 자신들의 전문성을 잃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성 산파가 여성 산파보다 유능하다는 생각이 퍼졌고, 이러한 주장 아래 상류층뿐만 아니라 중산층 여성 역시 산파보다 남성 산과 의사를 선택하게 된다(Donnison, 1977).

1820년대 남성 산파가 산파술 분야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대학 교육을 받은 남성 산파를 산과 의사로 부르게 되었다. 18세기 내내 여성 산파는 "출산은 자연이 정한 여성 고유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려 애썼지만, 노력의 결실을 보지 못했다. 18세기 말이 되면서 산파는 출산에 관해 자신이 누려온 독점적인 지위를 잃고, 한때 자신들이 지배한 분야에서 보조적인 위치에 머무르게 된다.

여성 산파의 쇠락은 단지 여성의 일자리 상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1760년대에 활동한 영국 산파 엘리자베스 니헬은 여성 산파의 시대가 지나가고 남성 산과의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여성이 산부인과 영역에서 스스로 몸을 통제할 권리를 잃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피임법 같은 산아제한 지식 역시 여성 산파가 몰락하면서 여성 사이에 전해지기 어려워졌다.

니헬은 남성이 산파술 분야에 진출한 이유는 그것이 좋은 돈벌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남성 산과 의사가 상류층이나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출산 영역은 얼른 빼앗았지만 가난한 사람의 출산을 돕는 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Nihell, 1760). 20세기가 되어서는 여러 계층의 더 많은 여성이 산파보다는 산부인과 의사를 통한 병원 출산을 택하게 됐다.
한국일보

1844년 이뤄진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제왕 절개 수술을 묘사한 그림. 엔리케 그 라우. 국제외과박물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의료도구, 약품사용 통제받은 한국의 조산사


한국의 경우를 보자. 조선시대 산파는 사회적 존경 면에서나 경제적 면에서나 당대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여성 활동가였던 정종명도 자유로운 생활과 ‘여성의 경제 독립을 위하여’ 산파 면허를 땄다(이꽃메, 2012).

조산사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 산파는 1960년대에 출산 호황기를 누리며 상당히 안정적인 지위를 누렸다. 규모가 큰 조산원에서 조산사가 산부인과 전문의를 직접 고용할 정도였다(이임하, 2015).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 실시 이후부터 보험 혜택을 받아 병원 출산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조산사를 찾는 이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급속히 쇠퇴하여 지금 조산원은 거의 폐원 상태다.

한국의 조산사 역시 과거 남성 산과의사에게 자리를 빼앗긴 유럽의 산파와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새로 개정된 의료법은 정상분만과 이상분만의 경계를 지어 조산사가 정상분만 때만 출산을 도울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경계가 모호하고 이상분만이라 하더라도 분만 과정을 멈출 수가 없다. 이러한 규정은 조산사가 언제든지 무면허 의료 행위자가 될 수 있게 해 그 위치를 불안전하게 만들었다(이임하, 2015).

또 남성 산과의사가 겸자의 사용을 독점했던 것처럼 조산사는 의료도구와 약품 사용을 통제받았다. 조산사는 산부인과 의사와 달리 진공흡입 분만기나 초음파 기기 등을 사용할 수 없었다(조영미, 2003). 이러한 규제는 조산사의 응급대처 능력을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의료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온다.

오늘날 출산은 의료화되었다. 산모는 환자로, 출산은 병처럼 여겨진다. 산파의 어원처럼 산모는 출산 과정에서 산부인과 의사가 과연 ‘함께 있는 사람’으로 느껴질까? 현대 출산 담론의 초점이 여성보다 태어날 아기에게만 집중되어 있고 여성의 주체적인 판단과 결정권, 그리고 건강이 자주 무시되는 현상이 한때 이 분야를 지배했던 여성 전문가가 자신의 자리를 잃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교훈을 생각해봤다. 여성이 돈을 적게 받는다면 그건 여성이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믿어져 왔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의 권위와 전문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필요하다. 그 집단 내에서 서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해야만 간신히 유지하거나 얻어낼 수 있으며 자칫하다가는 빼앗길 수도 있다. 혼자서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전문성이 설득의 영역이라면 우리는 타인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일보

하미나 작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하미나 작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