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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기자의 시각] ‘멸사봉공’ 영화 보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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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극장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을 봤다. 작년 일본서 개봉해 2880만명이 본 역대 흥행 1위 작품이다. 한국서도 지난 1월 개봉해 지금까지 197만명이 관람하며 장기 상영 중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작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흥행 수입을 올린 영화(약 5380억원)다. 일본 밖에서 1억달러(약 1133억원) 넘게 벌어 들였다. 게임·관련 상품 등을 합하면 경제 효과가 3조원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다.

조선일보

귀멸의 칼날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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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공을 뜯어보면 여러모로 특이하다. 원작은 ‘배틀물(物)’이라 불리는 전형적인 소년 만화인데 작가가 여성이다. 배틀물은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강력한 적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며 성장해나가는 서사 구조다. 멀게는 ‘드래곤볼’부터 가까이는 ‘원피스’ ‘나루토’ 등 이른바 ‘1억부 클럽’(판매부수 1억부)에 가입한 만화 중 다수가 배틀물이다. 하지만 그중 여성 작가가 그린 작품은 ‘귀멸의 칼날’이 유일하다. 등장인물이 예사로 죽고 주요 캐릭터들도 팔다리가 잘리거나 몸이 두 동강 나는 식의 잔인한 묘사가 많은데도 여성 독자 비율이 높다. 한국서도 만화책 구매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고 한다. 전개도 시원시원하다. 인기 있으면 50권을 가볍게 넘기는 다른 만화와 달리 깔끔하게(?) 23권으로 마무리 지었다. 초심자도 부담 없이 입문할 수 있는 분량이다.

무엇보다 이 만화의 서사는 트렌드에서 벗어나 있다. 주인공은 사람을 잡아먹는 ‘도깨비(오니·鬼)’를 소탕하는 귀살대원(鬼殺隊員)인데, 요즘 보기 드문 ‘열혈 바보’다. 선악과 공사 구분이 뚜렷하다. 동료들에겐 따뜻하고 자상하지만, 도깨비를 처단할 땐 단호하다. 불쌍하고 사연 있는 도깨비라도 “잘못은 잘못이니 저승에서 속죄하라”며 가차 없이 목을 벤다.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법도 없다. 자신보다 강한 도깨비라도 “내가 죽으면 동료들이 뜻을 이어받아 처단할 것”이라며 덤벼든다. 귀살대 선배들은 “선배가 후배의 방패가 되는 게 당연하다”며 산화한다. 후배는 “나약함에 절망하지 말고 마음을 불태워라”는 선배의 말을 가슴에 품고 전진한다.

‘귀멸의 칼날’엔 장기 침체와 고베·도호쿠 대지진 등 재난과 고령화 등으로 얼룩졌던 헤이세이 시대(1989~2019)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선악의 이분법을 냉소하거나 “우린 결국 안 될 거야”라는 식의 체념이나 절망도 없다. 오직 도깨비 말살이란 목표를 향한 멸사봉공뿐이다.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비장하고 처절하다. 그 촌스러움에 수천만 명이 울었다. 관객들은 ‘귀멸의 칼날’에서 한때 있었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어떤 정신을 본 게 아닐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기자와 함께 영화를 관람했던 관객들도 대부분 울었다.

[권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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