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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꿀벌이 뭐길래… 포르셰·롤스로이스도 살리기 나선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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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생태계 파괴에 집단 폐사···

세계가 ‘꿀벌 살리기' 나섰다

지난달 20일 서울 동작구 동작소방서. ‘한 고등학교 운동장에 꿀벌들이 살림을 차렸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인근에 자리 잡은 벌의 수만 어림잡아 2만 마리. 그런데 소방서 관계자들은 물대포로 직접 벌집을 제거하는 대신 일명 ‘꿀벌구조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곧 현장에 도착한 꿀벌구조대 활동가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마대에 벌 무리를 담아내더니, 훈연기로 여왕벌 흔적까지 말끔히 제거했다. 남은 벌들도 여왕벌의 냄새를 따라 벌통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구조된 벌들은 한국항공대 내부에 있는 양봉장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됐다.

꿀벌구조대는 말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꿀벌을 살리는 구조팀이다. 도시 양봉을 하는 사회적 기업 ‘어반비즈서울’이 성동소방서 등과 협약을 맺고 2019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은 소방서에서 벌집 제거 요청을 받으면 주로 물대포나 화염방사기를 사용했지만, 어반비즈서울은 자체 개발한 분봉 청소기 등으로 벌들을 산 상태로 구조한다. 이렇게 구조된 벌들을 도시 양봉장으로 옮기는 게 꿀벌구조대의 임무다.

이날 현장에 출동했던 어반비즈서울 박찬 이사는 “자연 생태계 유지에 꼭 필요한 벌들이 도심에서 터전을 잃는 게 마음이 아파 구조대를 운영하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벌이 얼마나 위기에 빠져 있길래 이들은 ‘구조대’까지 운영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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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 어반비즈서울이 운영하는 ‘꿀벌구조대’ 팀원이 분봉 청소기로 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구조한 벌은 인근 도시 양봉장으로 보낸다. /어반비즈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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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기온 현상에 꿀 생산량 10% 불과

양봉업만 42년째 하고 있다는 윤화현(66) 한국양봉협회 회장에게는 지난 한 해가 ‘역대 최악의 해’였다. 4월 늦추위로 꿀벌이 꿀을 주로 채집하는 아까시나무의 꽃봉오리가 제대로 맺지 못한 탓에 벌꿀 생산량이 평년의 30%에 불과했다. 200군의 벌통을 운영하고 있다는 윤 회장이 지난해 만진 돈은 기껏해야 2000만원 남짓. 통상 벌통 1군에 4만~5만 마리의 꿀벌이 들어있는 점을 감안하면, 1000만 마리의 벌이 마리당 겨우 2원을 벌어온 꼴이었다.

문제는 올해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 3월의 평균·최고·최저기온은 모두 기상 관측을 시작한 1973년 이래 가장 높았다. 아까시나무 꽃도 평년보다 5일 정도 먼저 폈다. 그런데 4월 들어 일부 지역의 기온이 영하권에 들어서고 비가 자주 오는 등 저온 현상이 발생하면서, 꿀 분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윤 회장은 “이런 이상기후 현상은 난생처음 겪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이상 현상’은 최근 전국에 걸쳐 발생하고 있다. 경기 남양주에서 3대가 양봉을 하고 있다는 김선희(68)씨는 “지난해 꿀벌 생산량이 2019년 대비 20%를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면서 “올해도 꿀 농사를 망칠 가능성이 크다. 막노동을 알아보는 농가가 있을 정도”라고 했다.

한국농촌경제원 조사에 따르면 2013년 연간 2810만원이었던 양봉 농가 소득은 2018년 207만원으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국내 꿀벌 사육 가구 수가 1만9903가구에서 2만9026가구로 증가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문가들은 양봉 농가의 수입이 급격히 줄어든 주된 원인으로 지구온난화를 꼽고 있다. 꿀벌들이 바뀐 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먹이를 생산하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또 농약 사용과 도시화로 밀원지(벌이 꿀을 빨아오는 식물의 서식지)가 파괴되고, 낭충봉아부패병 같은 바이러스 확산으로 토종벌 개체 수가 90% 정도 감소하는 등 꿀벌 생태계 전반이 위협받고 있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최근 10년간 꿀벌 개체 수가 40%가량 감소했고, 영국 역시 2010년 이후 45% 정도의 꿀벌이 사라졌다. 꿀을 채집하러 나간 일벌이 돌아오지 않아 유충이 집단 폐사하는 이른바 벌집군 붕괴 현상(CCD·Colony Collapse Disorder)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최초 꿀벌 수의사인 정년기 박사는 “최근 10년 사이 세계적으로 꿀벌 생태계가 빠르게 파괴되는 추세”라면서 “한국은 특히 단위면적당 꿀벌 개체 수가 많아 먹이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고 했다.

문제는 꿀벌이 자연 생태계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곤충이란 점이다. UN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꿀벌이 세계 100대 농작물의 71%를 매개(가루받이)하고 있다. 꿀벌 의존도가 100%인 아몬드는 벌이 사라지면 재배하기가 불가능해지고, 사과나 양파 등도 수분의 90% 이상을 꿀벌에 의존하고 있다. 하버드 공중보건대 연구에 따르면, 꿀벌 같은 꽃가루 매개 곤충들이 사라지면 과일과 채소 값이 급등해서 한 해에 140만명 이상이 사망할 수도 있다. UN은 2017년 개체 수가 급감하고 있는 꿀벌을 보존하자는 의미에서 5월 20일을 ‘세계 벌의 날’로 지정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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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핸드픽트 호텔이 건물 옥상에서 도시 양봉을 하는 모습. /핸드픽트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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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셰·롤스로이스도 ‘꿀벌 살리기'

꿀벌 생태계 조성 운동이 주목받는 건 이 때문이다. 기업이 사회 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직접 꿀벌을 키우거나, 아예 국가적 차원에서 꿀벌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다. 독일 자동차 브랜드 포르셰는 라이프치히 지역에서 꿀벌 약 150만 마리를 기르면서 한 해 400㎏의 꿀을 생산하고 있고, 영국의 롤스로이스도 본사 인근 부지에 25만 마리의 꿀벌 서식지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아모레퍼시픽이 자사 브랜드 ‘마몽드’를 통해 서울숲, 서울시립미술관 등지에 꿀벌 정원을 조성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양봉 산업 지원을 위해 2019년 양봉산업법을 지정하고 국유림을 중심으로 아까시나무 등 밀원수를 연간 150헥타르(ha)씩 심기로 하는 등 국가적인 ‘꿀벌 살리기’에 나섰다. 어반비즈서울이 꿀벌구조대를 운영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도시 양봉도 꿀벌 생태계 복원의 복안으로 꼽힌다. 도심에 양봉장을 만들어 벌들이 화단이나 공원에서 꿀을 채취하도록 하는 것이다. 도시 양봉을 하면 인근 꽃의 발화율이 증가해 다른 곤충과 소형 새가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서울 동작구의 핸드픽트 호텔은 2016년부터 호텔 옥상에 양봉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호텔 김성호 대표는 “양봉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자연환경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벌집을 처음 보는 어린이 고객들의 반응도 좋다”고 했다. 정년기 박사는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훼손된 밀원지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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