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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피난민, 학살자, 유엔군…세 꼭짓점 가운데 놓인 아이다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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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쿠오바디스, 아이다

세르비아군 저지른 끔찍한 집단학살

유엔군이자 보스니아 주민 아이다

남편과 두 아들 지켜야 하는 운명

‘모두 안전하니 안심하라’는 거짓말

알면서도 그대로 전해야 하는 상황

정의 말하며 작은 것 짓밟는 사람들

그들이 지른 불길에 타버린 일상

보스니아 전쟁범죄 피해여성의 상징


한겨레

세르비아군을 피해 보스니아 무슬림 민간인들이 기댈 최후의 보루는 유엔 평화유지군뿐인데, 150명 남짓 네덜란드군 병력이 전부인 유엔 평화유지군은 이 상황이 감당되지 않는다. 엠엔엠 인터내셔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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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지브리의 명인 다카하타 이사오의 언제 봐도 참신한 <이웃집 야마다군>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중학생인 ‘노보루’가 동네 서점의 남녀상열지사스러운 서적들이 집중돼 있는 구역에서 은밀하고도 의도 다분한 방황을 하던 중, 필시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한 같은 반 여학생을 마주친다. 하여 노보루는 근방에 있는 아무 책이나 황급히 집어드는 긴급 회피기동에 돌입하는데, 이 책을 본 여학생이 말한다. “보스니아의 비극? 너 굉장한 책을 읽는구나?” 이에 “바깥세상 일도 알아야지!”라며 호방히 답하는 야마다에게, 여학생이 떠나가며 날리는 대사는 이 돌발사태를 확실한 비극으로 굳힌다. “나중에 나한테도 빌려줘!”

이 두껍고도 심각하고도 난해한 책을,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한 이 사태야말로 “비극이다…”라며 신음 흘리는 노보루의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보스니아 전쟁과 그에 수반된 비극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 역사적·민족적·종교적·군사적·지정학적·국제정치적 양상들이 전선다발 위에 엎은 스파게티마냥 얽히고설켜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전쟁에서 인종청소(무차별 학살과 강간을 포함한) 등의 전쟁범죄를 자행했던 쪽이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인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인지, 그 피해자들이 무슬림계인지 가톨릭계인지 위 보기 중 정답 없음인지, 곧바로 떠오르지 않더라도 지적 자괴감에 빠질 사안은 결코 아니라 할 것이다.

인종청소 광기 속의 유엔군 통역관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마치 이런 국제 관객들의 고충을 충분히 안다는 듯 거두절미, 장황한 안내 말씀 없이 곧장 관객들을 상황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영화는 서로를 응시하는 주인공 아이다(야스나 디우리치치)와 아이다의 남편과 두 아들의 비장한 침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곧장 소련제 에이케이(AK)-47 소총을 들고 벌판을 전진하는 세르비아 군인들과 무한궤도 소음을 끼릭거리며 그들을 엄호하는 소련제 티(T)-55 전차를 보여준 뒤, ‘스레브레니차는 도살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라는 절망적인 목소리의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말 없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담배 연기를 뿜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이어간다. 이들 중 민간인인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초조한 듯, 군복을 입은 유엔 평화유지군은 난처한 듯 연신 손가락을 놀리는 가운데, 유엔 직원 아이디카드를 목에 걸고 있는 아이다는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영화는, 흡사 드라마의 1화마냥, 도입부 3분가량에 전체 구도와 핵심인물들 대부분을 펼쳐놓는다. 요약하면 이렇다. 민간인 무슬림들을 무차별 살해하는 ①세르비아군을 피해 ②보스니아 무슬림 민간인들이 기댈 최후의 보루는 ③유엔 평화유지군뿐인데, 150명 남짓 네덜란드군 병력이 전부인 유엔 평화유지군은 이 상황이 감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유엔 직원이자 스레브레니차에 사는 무슬림인 ④아이다는 그 한가운데에서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

왜 세르비아군이 보스니아 무슬림(‘보슈냐크’)들을 인종청소의 대상으로 삼게 됐는지, 그리고 당시 유엔 평화유지군은 왜 그렇게 빈약하고 무기력했는지 등등에 대해서 논하자면 이 지면의 표면적 열배를 상회하는 지면이 주어져도 모자랄 것이므로 이는 패스하는 가운데, 아무튼 이렇게 단순명료하게 제시된 상황에, 폭격 뒤 마을에 진입해 민간인들을 거침없이 살상하는 세르비아군의 모습까지 더하면서 영화는 선악구도 뚜렷한 장르적 이야기 구조와 톤을 취하게 된다. 나아가, 세르비아군을 피해 평화유지군 기지로 피난한 무슬림들이 더 이상 피난민을 수용할 수 없다는 평화유지군의 저지에 막혀 게이트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면 영화는 거의 좀비물과 흡사한 양상마저 띤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 소속 통역사인 아이다는 ①학살 직전 피난민들이 피신했던 유엔군 기지 안쪽 곳곳을 자유롭게 들여다보는 내시경 ②유엔군과 피난민들 사이에 놓인 경계선에서 양쪽 모두 거리를 둔 채 관측하는 전망대, 그리고 ③막다른 곳에서 피난민들이 느꼈을 공포와 비통함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연결선, 이 모두가 된다.

피난민, 학살자, 유엔군의 세 꼭짓점으로 이루어진 부등변삼각형에 존재하는 단 하나 무게중심 위에 절묘하게 놓인 아이다의 이 독특한 입장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의 통역 장면일 것이다. 그는 ‘모두 안전하다’ ‘패닉에 빠질 필요 없다’는 유엔군의 말이 전혀 진실과는 다르고, 오히려 동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메가폰에 대고 외쳐야 한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그 말들과는 정반대로 행동해야 한다. 가족들만은 살리기 위해.

가족들 중 혼자서만(!) 유엔 직원으로서 안전을 보장받는 아이다의 입장은 위 ③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는 이 영화에 가장 강력한 정서적 추력과 딜레마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는 영화 후반부, 아이다 부부가 두 아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둘 중 한명이라도 기지에 남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에서 정점을 찍으며 궤멸적 파괴력으로 폭발한다.

이 가혹한 생과 사의 갈림길에 던져진 아이다에게 <쉰들러 리스트>적 박애주의 같은 것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이미 남편-자식들을 비장하게 응시하는 아이다를 통해 이를 못박았다. 가족을 살리려는 아이다의 동분서주는 거의 전투적인 색채를 띤다. ‘모성본능’ 같은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시다시피 보스니아 전쟁에서 무슬림 여성들은, 강간과 그것으로 생긴 아이를 강제로 낳게 해 무슬림을 인종적으로 절멸시키겠다는 멍청하기 그지없는 광기의 인종청소로 인해, 일반적인 상상의 범위를 넘어선 고난을 겪었다.

한겨레

‘모두 안전하다’ ‘패닉에 빠질 필요 없다’는 유엔군의 말이 진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메가폰에 대고 외쳐야 한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그 말들과는 정반대로 행동해야 한다. 가족들만은 살리기 위해. 엠엔엠 인터내셔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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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작 <그르바비차>를 통해 이 인종청소 피해여성의 고통을 정면으로 다뤘던 감독 (겸 각본) 야스밀라 주바니치는, <쿠오바디스, 아이다>에서 이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있는 믈라디치 장군을 아이다의 대척점에 세운다. 믈라디치 장군은 남성이다. 점령된 스레브레니차에 입성해 장갑차에서 내리면서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순간 스쳐가서 놓치기 십상인 장면이지만) 국부를 슬며시 정리정돈하는 일이다. 이는 영화의 입장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유엔군 기지 내에서의 피난민의 출산, 발굴된 학살 유해들 사이를 유령처럼 걸어다니는 여성들의 모습, 그리고 ‘스레브레니차의 여성들과, 살해된 그들의 8372명 아들, 아버지, 남편, 형제, 조카, 이웃’을 기리는 클로징 자막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니까 아이다는 수컷들이 시작한 전쟁에서 수컷들로부터 가장 극심한 치욕과 고통을 받은 보스니아 전쟁범죄 피해여성들 전체다. <그르바비차>의 주인공 ‘에스마’가 그랬듯. 하지만 이 영화가 ‘남 vs 여’라는 단선적이고도 유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전선은 어디까지나 전쟁의 개들과 그들의 먹이가 된 민간인들 사이에 그어져 있다.

그리고 감독은 그 전선을 자신의 영역인 영화(또는 영상)라는 미디어로까지 넓힌다. 믈라디치 장군은 가는 곳 어디든 카메라맨을 데리고 다니며 영상 촬영을 지시한다. “나를 찍지 말고 저들(피난민들)을 찍어”라든가 “배경은 찍었나?” 같은, 그러면서 영웅적 점령선언을 녹화하는 순간 갑자기 터져 나온 총성에 화들짝 놀라 장갑차 뒤로 몸을 숨기는 ‘카메라 프레임 밖에서는 겁쟁이’의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 전쟁 당시에도 믈라디치가 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세르비아군이 포로와 민간인들을 공정하게 대한다는 이미지를 알리려고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감독은 그런 믈라디치의 미디어전(戰)에 대한 답(또는 반격)으로 화면 밖 믈라디치의 모습을 돌려주는 듯하다.

“누군가 반드시 영화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내가 되길 바라진 않았다”는 감독의 고백처럼, 26년이 지난 지금에도 스레브레니차 학살의 원인과 그에 대한 믈라디치의 책임을 포함해 보스니아 전쟁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민감한 뇌관이다. 감독이 언급하고 있듯, 그런 상황에서 세르비아인인 아이다 역의 야스나 디우리치치와 믈라디치 역의 보리스 이사코비치가 이 영화에 출연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임은 전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전쟁이란 타버린 프라이팬 같은 것


다행히도 영화 전체를 처음부터 휘어잡고 끝까지 거침없이 끌고 가는 야스나 디우리치치의 연기에 결정적으로 힘입어, 영화는 한번 관람을 시작하면 결코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영화로 완성되었다. 정말이지 눈을 돌리고 싶어지는 참담함과 갑갑함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사실 필자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등에 선명한 총탄 자국이 난 시신이 된 채 쓰러진 여인 옆에서 새까맣게 타고 있는 프라이팬을 보여주는 영화 초반부의 짧은 한 장면이었다. 결국 전쟁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몇 점 유골과 넝마 조각으로 돌아온 사람들, 일상이었던 모든 것을 잃은 이의 고통과 절망, 그리고 그 뒤에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는 분노와 증오. 대의니 더 큰 정의니 하는 거창한 것들을 말하면서 작은 것들을 밟는 데 익숙한 자들이 지른 불에 프라이팬처럼 새카맣게 타버린 일상. 그런 것들은 언제나 매캐한 연기와 함께 더 큰 불로 돌아온다. 8372명이든, 단 한 명이든.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 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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