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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축구장 4배' 최대 컨테이너선 수에즈운하 처음 지나갈때 느낌은 덤프트럭 몰고 농로에 가듯 아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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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전기운 선장이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알헤시라스호에서 포즈를 취했다. 알헤시라스호는 한 번에 2만3964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항해할 수 있다. 기존 대형 컨테이너선의 두 배다. [사진 제공 = H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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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헤시라스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컨테이너선이다. 축구장 4배 크기의 이 배를 조종하는 사람은 32년 차 베테랑 전기운 HMM 선장(54)이다.

국내 최대 원양 컨테이너선사인 HMM은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 '흠슬라(HMM+테슬라)'로 불린다. 최근 주가 상승세가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 못지않다는 뜻에서 붙여진 신조어다. 가장 큰 이유는 실적 개선이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세계 각국에서 앞다퉈 경기부양책을 꺼내면서 전 세계 물동량이 급증한 영향이다. 그 덕분에 HMM의 작년 영업이익은 10년 만에 흑자 전환했다. HMM은 정부 지원으로 지난해에만 세계 최대 규모인 2만4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 12척을 투입했다. 알헤시라스호는 이 중 지난해 4월 최초로 인도받은 선박이다. 걱정과 우려 속에 출항한 알헤시라스호는 유례없는 만선을 기록하며 수개월 만에 금의환향했다. 한국 해운업의 부활을 알린 것이다. 최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주인공 전기운 선장을 만났다.

―알헤시라스호를 운항하고 돌아왔다. 소감이 어떤가.

▷알헤시라스호는 인도받을 때부터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2018년 정부가 발표한 해운 재건 5개년 계획의 신호탄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알헤시라스호는 곧바로 아시아·유럽 항로에 투입됐다. 8개월간 운항하면서 기항하는 주요 항구마다 축하 세리머니를 받았다. 세계 최대 크기의 선박을 각자의 방식으로 환영한 것이다. 수에즈운하를 통과할 때에는 세계 최대 선적량을 경신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번 운항은 2016년 한진해운 파산 이후 외국 선사에 의존하던 유럽 항로에서 주도권을 되찾았다는 의미가 크다. 그 중심에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큰 영광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여건에도 묵묵히 역할을 다해준 동료들에게도 감사하다.

―알헤시라스호는 기존 컨테이너선과 어떻게 다른가.

▷우선, 크기에서 다른 선박들을 압도한다. 앞뒤 길이만 400m에 폭과 깊이는 각각 61.2m, 33.2m에 이른다. 갑판 넓이는 축구장 크기의 4배 이상이다. 20피트짜리 컨테이너를 한 번에 2만3964개 실을 수 있다. 이전까지는 많이 실어야 1만2000여 개에 불과했다. 선장을 포함한 승무원 수도 20여 명에 달한다. 다른 선박과 달리 최첨단 기술도 많이 적용됐다. 하이브리드형 스크러버(탈황설비)가 장착돼 있고, 추후 액화천연가스(LNG) 연료 추진선으로 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국제해사기구(IMO) 환경 규제에 대응하기 쉽다.

1967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성산수산고(현 성산고)를 졸업한 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환경 탓에 학비가 비교적 저렴한 목포해양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1988년 해군 하사로 복무하다 1990년 돈을 벌기 위해 동국선사에 입사했다. 1995년 현대상선(현 HMM)으로 옮긴 뒤 1등 항해사를 거쳐 2002년부터는 선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연평균 지구 5바퀴, 현재까지 지구 150바퀴의 거리를 무사고로 운항했다. 한국 수출의 선봉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32년째 바다와 함께하고 있다.

―배 안에서의 업무는 어떻게 나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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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은 선박 운항과 관련된 모든 일을 총괄한다. 선장을 도와 보수·정비를 책임지는 기관장이 있다. 그 하부 조직으로는 갑판부와 기관부가 있다. 갑판부에는 선박 안전과 화물 선적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1등 항해사와 항해 계획을 수립하고 통신장비를 관리하는 2등 항해사, 항만 입출항 작업을 준비하는 3등 항해사, 조리 업무를 담당하는 조리부원, 갑판부원이 있다. 기관부에는 스크러버와 윤활유 등을 관리하는 1등 기관사와 발전기·연료유 관리 등을 맡는 2등 기관사, 보일러·냉동기 등을 담당하는 3등 기관사, 기관부원이 있다.

―한 번 출항하면 수개월씩 걸린다. 배 안에서는 주로 무엇을 하는가.

▷배 안은 24시간 쉴 틈 없이 돌아간다. 일단 승선하면 하선할 때까지 쉬는 날 없이 계속 일한다고 보면 된다. 평균적으로 승선 기간은 6개월 정도 된다. 승무원들은 보통 당직조를 꾸려서 4시간씩 3교대로 근무한다. 본인 업무가 끝난 뒤에는 쉬기도 하고, 밀렸던 문서 작업 등을 하기도 한다. 정해진 항구에 기항하면 정해진 시간 내 운항에 필요한 자재나 연료, 주·부식 등의 선적 업무를 수행한다. 간혹 정박 시간이 길어지면 육지에 나가 생필품을 사오거나 해당 도시를 둘러볼 때도 있다.

―배 안에서 여가시간은 어떻게 보내는가.

▷아무래도 타지에 오래 나와 있다 보니 쉬는 시간에는 주로 가족이나 지인들과 SNS로 연락을 많이 한다. 동영상 재생까지는 안 되지만 메신저 대화를 할 정도의 인터넷은 된다. 또 배 안에 헬스장과 탁구장, 노래방 등이 갖춰져 있어 삼삼오오 모여 운동을 하기도 한다. 드라마나 예능 등 TV 프로그램 녹화본을 구입해서 보는 경우도 있다.

―선장실이 남다를 것 같다.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몇 평 되는 작은 공간에 침대와 책상이 있고, 욕조가 갖춰진 샤워실이 있는 정도다. 한쪽 면에는 운항 시스템을 볼 수 있는 모니터와 CCTV가 놓여 있다. 큰 배든 작은 배든 선장실의 생김새는 대부분 비슷하다. 식당에도 선장석은 따로 마련돼 있다.

―선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선장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다. 예컨대 중국을 지날 때는 집중을 많이 한다. 어선들이 워낙 많아 충돌 사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날씨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기상은 운항에 영향을 많이 준다. 여름철 유럽 항로는 인도양의 악천후와 태풍을 주의해야 한다. 겨울철에는 유럽 항구에서 돌풍 피해가 없는지 기상 정보를 잘 봐야 한다. 경로상 인도양 아덴만 해적위험구역을 지나는데, 그때마다 해적 피습 가능성을 모니터링한다. 또 배 안에서 승무원이 부상을 입었다면 직접 응급처치를 하기도 한다. 모든 선장들은 관련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위급한 경우에는 선체 내 시스템을 이용해 육지의 의료진과 영상 진료를 연결한다.

―최근 수에즈운하에서 사고가 발생했는데.

▷알헤시라스호도 작년 12월에 수에즈운하를 지나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가 발생해 안타깝다. 배를 운항하다 보면 각종 사고를 접하게 된다. 선박 엔진이 고장 나거나 기상 문제로 배가 멈추기도 한다. 어느 배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안전 운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사실 알헤시라스호도 수에즈운하를 지날 때 부담이 상당했다. 크기가 기존에 HMM에서 가장 큰 1만3000TEU급보다 2배 가까이 컸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덤프트럭으로 농로를 지나야 했다.

―컨테이너선이 부족할 정도로 해운업이 호황이다.

▷오랜 기간 불황을 겪다 작년 하반기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현장에서도 바로바로 느껴진다. 과거에는 주요 선사들이 경비 절감을 위해 싱가포르 인근 대기지에 선박을 많이 세워뒀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부터는 대기지에 배가 잘 안 보인다. 실제로 HMM도 39항차 넘게 만선을 기록 중이다. 그동안에는 경쟁 선사들의 만선 운항을 그저 부러워하기만 했는데, 요즘에는 화물을 한가득 실은 선박을 보면서 '배 탈 만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일할 맛을 넘어 이제는 자부심까지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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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헤시라스호가 지난해 6월 독일 함부르크항에 입항하는 모습. 함부르크항 측은 알헤시라스호를 환영하는 의미로 물 대포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사진 제공=H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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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4월 알헤시라스호 명명식 때만 해도 예상 못했을 것 같다.

▷알헤시라스호는 정부의 해운 재건 5개년 계획의 첫 번째 가시적인 성과였다. 그러다 보니 대우조선해양 거제조선소에서 진행된 명명식에 이례적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를 비롯해 수많은 정부와 해운·조선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출항을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잇단 '셧다운'에 전 세계 물동량은 급감했고, '물량을 다 못 채우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부터 앞섰다. 우려와 달리 만선 운항을 무사히 마쳤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특별한 선물을 받았는데.

▷명명식 당일 문 대통령으로부터 전통 나침반인 '윤도'를 받았다. 선장 개인이 아니라 한국 해운업 재건에 앞장선 알헤시라스호에 선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윤도를 명명식날 찍은 기념사진, 운항 도중 김정숙 여사로부터 받은 축전과 함께 알헤시라스호 안에 선원들이 모두 볼 수 있게끔 잘 전시해놨다. 개인적으로는 알헤시라스호 운항 자체가 큰 선물이다. 영광스러운 경험은 물론이고 오랜 승선 생활로 삶의 권태를 느끼던 차에 새로운 동기 부여가 됐다.

―직업으로서 선장의 장단점을 꼽는다면.

▷장점으로는 배 위에서 장기간 생활하다 보니 돈 쓸 데가 없다. 그만큼 급여 대부분을 저축할 수 있다. 6개월가량 승선하고 오면 유급휴가가 2~3개월 정도 주어진다. 남들보다 휴가를 유용하게 보낼 수 있다. 또 본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서는 정년 이후에도 승선이 가능하다. 명예퇴직이나 임금 삭감 등을 걱정하는 다른 직군보다 비교적 안정적인 편이다. 단점으로는 가족과 수개월간 떨어져 지낸다는 점이 크다. 아내가 첫째아이를 출산할 때, 부친과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승선 중이어서 함께하지 못했다. 이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다 보니 30년 넘게 배를 타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에 도착할 때가 되면 학창시절 소풍 가기 전날의 설렘이 있다. 반대로 승선하러 갈 때는 '100일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군인의 마음이다.

[송광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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