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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삶의 창] 그가 옳고 내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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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한겨레

김소민 l 자유기고가

우리는 20년 동안 알고 지냈다. 별로 안 친하다. 만날 때마다 그는 나한테 숙제를 줬다. 2019년 양꼬치 집에서 만났을 때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인 그는 형제복지원대책위 사무국장도 맡고 있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한종선씨랑 너랑 동갑이야.” 그가 선감원 등 수용소 관련 자료 뭉텅이를 줬다. 취재해 보라고 했다.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며, 나는 그와 술 마신 걸 후회했다. 행색이 추레해서, 집이 없어서, 고아라서 끌려간 사람들에게 국가가 저지른, 고문 수준의 폭력을 듣기 싫었다. 모르면 죄책감도 없을 테니까.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계속 들어?”

비영리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이하 ‘발바닥’)은 그를 포함해 다섯명이 2005년에 만들었다. ‘탈시설’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장애인 당사자들과 함께 농성하다 팔다리 잡혀 끌려 나왔다. 지자체와 정부를 쫓아다니며 탈시설 지원 체계를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그때 나는 그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어디서 살라고?’

1999년 26살 그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활동가로 일할 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특수학교 교사의 제보 전화였다. 강원도 정선 ‘믿음의 집’이라는 시설이 이상하다는 내용이었다. “세명이 작전을 짰어. 입소 문의 하러 간 척한 거야. 원장이 5천만원을 주거나 생활보호대상자로 만들어 통장과 도장을 주면 평생 맡아준다고 하더라. 컨테이너 10칸에 발달장애인 40여명이 살았어. 한 아주머니가 커다란 자루를 들고 컨테이너로 들어왔어. 뻥튀기를 바가지로 퍼서 바닥에 뿌려. 주워 먹으라고. 마당엔 한 20대 남자가 묶여 있었어. 그 남자가 원장 아들이야. 국회의원과 언론에 제보해 방송에 나왔지. 시설이 폐쇄됐는데 거기서 살던 사람들이 갈 곳이 없었어. 대다수 다른 시설로 갔어. 시설 밖에 나와 살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 했던 거야. 우리도.”

2005년 그는 시설 실태조사에 참여했다. 결론은 자명했다. ‘좋은 시설은 없다.’ 그리고 그는 ‘도망’갔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실태를 들은 건 처음이었어.” 이제 중년인 그가 그 기억에 울먹였다. “죄책감이…. 그 사람들은 거기 있어야 하는데 나는 돌아왔잖아. 무력감이 몰아치더라고.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어.” 농부가 되겠다던 그는 돌아왔다. “광화문 횡단보도를 지나는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을 전경이 막고 있는 거야. 집회 참여 못 하게. 내가 따지니까 한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같이 싸워주더라고.”

2006년 그가 종로구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할 때였다. “뇌병변 1급장애가 있는 김선심 언니가 전화로 다짜고짜 자기는 시설에서 더는 못 산다는 거야. 데리러 오라고. 그 언니가 조카한테 핸드폰을 하나 받았대. 그 핸드폰이 언니에겐 유일한 자유였어. 그런데 원장이 ‘네가 핸드폰이 왜 필요하냐’며 뺏어갔대.”

그때 ‘탈시설’한 김선심씨는 10년 뒤 2천만원을 노들장애인야학과 ‘발바닥’에 기부하며 “한명이라도 더 데리고 나오라”고 당부했다. 2009년 석암재단 인권침해와 비리에 맞서 투쟁하던 중증장애인 여덟명이 서울 마로니에공원에서 62일 동안 노숙 농성을 벌이며 탈시설 운동은 주목받았다. 서울시는 2013년 탈시설 추진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2020년까지 861명이 시설을 나와 독립했다. 정부는 올해 8월 ‘로드맵’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계획도 아니고 계획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10년 넘게 걸렸지만, 결국 그가 옳고 내가 틀렸다.

“힘들어?” “힘들지. 그런데 함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투쟁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어.” “네 이름 써도 돼?” “이름은 ‘발바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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