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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도시를 느리게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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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한겨레

낯선 길을 느리게 걷다 만난 익숙한 풍경, 남산. 사진 배정한


한겨레

배정한 l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친구들은 도시 구석구석을 누비며 구경하는 게 곧 공부이자 연구인 전공으로 밥벌이하는 나를 부러워한다. 도시의 삶과 풍경을 경험하고 이해하기 좋은 방법은 땅바닥에 발을 딛고 걸으며 공기를 마시고 날씨에 몸을 맡기는 것. 그저 걸으면 된다. 걷기는 도시와 친해지는 가장 감각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걷고 보고 사진 찍으며 전쟁 치르듯 해내는 도시 답사가 늘 힘에 부쳤고 즐겁지도 않았다. 가장 느린 이동 방법인 걷기를 선택했으면서도 속도, 효율, 성과를 의식해야 하는 모순 때문이었을까.

부끄럽지만, 뒤늦게 나는 걷기의 매력을 책으로 배웠다. 2년 전 봄, 도시의 보행과 경관의 미적 경험을 엮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머리를 쥐어뜯다가 읽지 않고 모셔둔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고통의 순간에 걷고 또 걸은 니체, 바람구두를 신고 세상을 누빈 랭보,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 루소, 자본주의의 아케이드를 소요한 베냐민. 걷기나 산책을 주제로 삼는 책의 단골 주연들이지만, 그날따라 느리게 걷고 깊이 사유하며 공간과 시간을 제 것으로 장악한 그들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다 책을 덮었다. 몸을 일으켜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을 지는 쪽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개성 없는 신도시의 무표정한 풍경이지만 공기는 투명하고 빛은 예리했다. 복잡하게 뒤엉킨 습한 생각들을 바람에 말리며 걷다가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 발과 땅이 대화하는 느낌, 나 자신을 세상으로 여는 느낌, 풍경을 만나는 주도권이 나에게 돌아오는 느낌. 아무런 목적이 없었기에 가능한 경험이었다. 이동이나 답사처럼 특별한 의도를 갖는 걷기와 달리 그냥 느릿느릿 걷다 어슬렁거리며 떠돌다 옆길로 새는, 우연에 내맡긴 자유로운 걷기가 시간에 속박된 신체를 해방시켜주었다.

물론 그날 이후 걷기가 나의 일상으로 성큼 들어온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이론형 인간인지라 닥치는 대로 걷기 책을 모으고 읽어나갔다. 걷기와 사유가 교차하는 아름다운 책들을 읽다 보면 도시를 느리게 걸으며 섬세한 풍경을 누리는 것 못지않은 즐거움이 생긴다. 다비드 르브르통의 <걷기예찬>이나 크리스토프 라무르의 <걷기의 철학>이 경쾌한 산책이라면,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은 긴 도보 여행이고,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은 거리로 뛰쳐나온 전위적 발걸음이다. 다음 학기쯤엔 대학원 강의 ‘환경미학’에서 읽기와 걷기를 연결하는 세미나, ‘걷기의 미학: 도시에서 길을 잃다’를 꾸려볼 생각이다.

걷기 덕후들이 들으면 실소할 일이겠지만, 도심에서 약속이 있을 때 한두 정거장 먼저 내리기, 연구실에서 가장 먼 구내식당에서 저녁 먹기, 학교 도서관에 갈 때 매번 다른 길로 가기 같은 소박한 걷기 습관도 생겼다. 운동이나 다이어트 같은 목적 없이 잠시 걸으며 계절과 날씨를 맛보는 소소한 일상이 행복감을 준다. 운전할 때는 1분이라도 덜 걸리는 길을 찾느라 필사적이지만, 신기하게도 걸을 때는 시간이 더 걸리는 길로 돌아가고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하게 된다. 시간에 사로잡히지 않고 시간을 마음껏 탕진하는 재미가 기쁨을 준다.

<두 발의 고독: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싱긋, 2021)의 저자 토르비에른 에켈룬은 뇌전증 진단을 받은 뒤 더 이상 운전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나 습관이 바뀐 것일 뿐 그가 잃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가야 할 곳이 있으면 모두 걸어서 가게 되자 길이 그의 삶 속으로 다시 돌아왔다.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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