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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은 적은 없었다 [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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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지음 | 창비 | 324쪽 | 1만4000원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와 와글와글한 인파와 소음 속에 합류했다. 삶의 뭉근한 긴장 속으로. 그것은 확실히 발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날들이었다. (…) 나는 푸성귀며 고기며 생선과 화초가 뒤섞여 있는 시장 어딘가에서 자주 웃었고 사랑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김승옥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김금희의 단편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20대의 어느 여름, 사랑이 ‘발생’했다가 이내 어긋나고야 마는 한 계절의 이야기다. 화자인 대학생 ‘채은경’과 그의 학과 선배인 ‘기오성’은 경기 광주에 위치한 노교수의 종택에서 족보 정리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름을 보낸다. 시골의 유서 깊은 고택, “문중의 숙원사업”이라는 족보 정리나 ‘꿩이 없어’ 아쉬운 교수 사모의 개성 요리로 채워진 격조 높은 세계를 벗어나면 이와 대비되는 왁자한 모란시장의 풍경이 펼쳐진다. 시장엔 “교수의 가족들과 우리 사이에 음식 냄새처럼 은은하게 번지던 위화감”이 없었고, 족보의 “이미 다 죽어버린 사람들의 이름”과 대비되는 “삶의 뭉근한 긴장”이 있는 그곳을 거닐며 둘은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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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금희가 네 번째 소설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로 돌아왔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떠올리는 지난 시절의 미세한 감정의 진폭들, 좌절과 상실로 굴절된 마음과 대면하는 과정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 낸다.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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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여러 가지 상심과 회한
선뜻 꺼내 보이기 힘들었던
2000년대 초·중반 20대를 보낸
그 마음의 질감들을
밀도 있게 펼쳐 보인다

고택의 세계에서 어긋나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이 노교수의 손녀인 ‘강선’이다. 미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돌아왔지만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다시 유학을 준비하는 강선은 노교수나 족보로 상징되는 질서와 위계를 대놓고 비웃고 무시한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셋이 함께 천변을 찾은 어느날, 계절을 잘못 찾은 고니들을 보며 “넌 어디서 왔니?”라고 묻는 기오성의 말에 강선은 무심히 말한다. “페퍼로니에서 왔어.” 페퍼로니 피자는 강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데, “한국에 돌아와 애들이 자꾸 그렇게 물어서 그런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 여름, 강선의 교묘한 말로 사랑이 ‘발생’하는 듯했던 화자와 기오성의 관계는 틀어진다. ‘나’는 오해를 풀려는 노력이나 다가섬 없이 빠르게 그 관계에서 물러나버린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그 물러섬이 “그렇게 해봤자 손에 쥘 게 없다는 가난한 체념”이 아니었을지 자문한다.

소설은 어느덧 마흔 무렵에 접어든 화자가 기오성에 대해 알고 싶다는 다큐멘터리 PD의 연락을 받은 뒤 “연속적으로 환기되는 오래전 여름들”을 되짚으며 전개된다. 시민운동에 열성이었던 기오성은 팟캐스트를 운영하며 참여정부의 청년정책을 비판하다가 보수정당에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한때 ‘청년 논객’으로도, 변절한 ‘수구 변태’로도 불렸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소설은 종잡을 수 없는 한 시절과 사회의 단면이 투영된 듯한 인물 기오성을 중심으로 2000년대 초·중반 20대를 보낸 세대의 성장담을 펼쳐보인다.

김금희의 네 번째 소설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표제작인 이 소설을 비롯해 한 세대의 회고 서사로 읽힐 수 있는 여러 소설이 수록됐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떠올리는 그 시절의 미세한 감정의 진폭들, 그 가운데 또렷해지는 어떤 좌절과 상실의 기억과 대면하는 과정을 섬세한 필치로 그린다. 거기엔 삼수생인 ‘나’와 방황하는 의대생 ‘장의사’가 함께 보낸 패배한 여름의 풍경이 있고(‘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유학시절 ‘투쟁의 가드닝’을 함께했던 재일 조선인 유키코의 불평들이 사실은 “슬픔 같은 것”이 아니었을지 상기하는 오늘(‘마지막 이기성’)이 있다. 여러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김금희는 삶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여러 상심과 회한, 선뜻 꺼내보이기 힘들었던 그 마음의 질감들을 특유의 밀도로 펼쳐보인다.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듯 내뱉은 강선의 말은 시간이 다소 흘러 기오성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 스물일곱 기오성은 평화운동 일환으로 어렵사리 이라크 바그다드를 찾지만, 현지에서 한국인이 ‘점령군’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이틀 만에 그곳을 떠나야 했다. 한국군 파병 결정과 맞물려 한국인 피살이란 비극이 발생한 때였고, 그런 이유로 함께하기로 한 구호단체에서도 빠져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기오성은 그곳을 떠나기 전, 자신의 담배를 훔친 ‘꼬마 도둑’의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오래전 강선의 말로 답한다. “페퍼로니에서 왔어.”

인물들에게 그 시절은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세월이 흘러 화자는 이렇게 돌아본다. “여러번 괘안타, 라고 말했지만 정말 괜찮은 적은 사실상 없었다는 것.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울고 싶은 기분으로 그 시절을 통과했다는 것. 그렇게 좌절을 좌절로 얘기할 수 있고 더 이상 부인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성장이었다.”

한 편의 회고담이자 성장 서사로도 읽히는 소설은 지나온 시절을 미화하거나 그때의 좌절과 성장을 낭만화하지 않으면서도 기어이 “환하고 무른 기억”(‘작가의 말’)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쌓아올린 한 세대, 한 시절 ‘우리’의 시간들이 이 소설에 복원됐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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