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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기획연재> 허균, 서른셋의 반란 (15)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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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슴 속에서 설레임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 다시 춘섬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한 번 당한 뒤라 그런지 도대체 신뢰가 가지 않았다.

춘섬이 재빠르게 쐐기를 박았다.

“이번에는 진짜라도 그러네.”

“정말 믿어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러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네.”

장담하는 춘섬

춘섬의 하는 양으로 미루어 결코 거짓이 아닌 듯했다.

확신이 서자 이번에는 계량이 다가앉았다.

“그 분에 대해 좀 더 귀 뜸 줄 수 없나요.”

“이야기한 것이 다네.”

살갑게 다가서는 계량의 볼을 가벼이 만져 주고는 춘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잠시 후에 그 분을 이리로 모셔올 터이니 네가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해. 만약 내가 말한 내용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바로 기별을 넣어주고 말이야.”

춘섬의 행동이 당당했다.

춘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백대붕과 유희경의 이름을 되뇌었다.

계량이 아는 바로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면 그 두 사람 외에는 이렇다 할 사람이 없었다.

방금 전 서쪽으로부터 번져오는 저녁노을을 대할 때보다 가슴이 더욱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쪽문에 서려있는 저녁노을이 계량의 가슴을 더욱 깊이 설레게 파고들었다.

“나으리, 부끄럽사옵니다.”

허균이 급히 손사래 쳤다.

매창의 거문고 소리에 취해 아련한 꿈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무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오, 내 그만 거문고 소리에 취해버렸소. 매창의 거문고 소리를 들으니 이 술에 취하는 일은 그저 장난에 불과하구료.”

“너무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이제 소녀를 그만 놀리십시오.”

“어허, 놀리기는. 내 진정으로 자네의 거문고 소리에 취했다고 해도 그러는구려.”

매창도 더 이상 다그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거문고를 밀쳐내기 위해 상에서 물러나려했다.

“잠깐, 한 곡 더 들을 수 있겠소.”

허균의 표정이 간절했다.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인 허균이건만 왠지 자신과 연배인 듯 살갑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오시면.”

거문고를 물리려다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허 험.”

“계량이 안에 있느냐.”

밖에서 동시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먼저 들린 그 소리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비록 기별을 넣는 신호에 불과한 소리였건만 예삿소리가 아닌 듯이 느껴졌다.

계량이 다시 한 번 옷매무시를 가지런히 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바라보지는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고개 들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시지요, 나리.”

“허 험.”

똑 같은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어서 드시지요.”

손을 맞이하는 계량의 목소리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미풍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면 내 실례를 무릅쓰리다.”

방문을 들어서는 손이 정식으로 내지른 일성이었다.

그 뒤를 춘섬이 따라 들었다.

“자, 어서 인사 여쭙게나.”

“내가 바로 촌은 유희경”놀라는 춘섬과 계량
어디서 보았음직한 모습…‘아버지’떠올리다

손이 자리에 앉자 급히 춘섬이 계량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인사는 무슨.”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계량이 공손하게 예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터져오를 듯이 부픈 계량의 가슴 윗부분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 모양으로 손의 얼굴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소녀 계량이라 하옵니다. 나리의 존함은…….”

예를 마친 계량이 고개 들어 손을 바라보았다. 40 중반 나이는 되었음직했다.

얼굴 여기저기에 가느다란 주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그윽한 맛이 잔잔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고 그 모습에 계량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내 이미 그대의 이름을 한양에서 듣고 있었고 그래서 일부러…….”

손도 역시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나리께서는 백대붕 나리와 촌은 선생님 중 어느 분이신지요.”

당당하게 말을 한다고 했는데 역시 떨리고 있었다.

“그대는 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요?”

“그것이 소녀가 알고 있는 전부이옵니다. 조선 땅에서 두 분 외에는 달리 시인이라 일컬을 수 있는 분이 없어서지요.”

“그대는 무슨 연유로 조선의 시인을 두 사람으로 한정하는 게요.”

“굳이 두 분으로 한정 한다기보다 소녀가 알고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옵니다.”

자신의 편협함을 돌려서 이야기했다. 편협함이 아닌 계량이 알고 있는 진정한 시인의 경우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던 터였다.

“허 허, 이 조선 땅은 넓다오. 어찌 그 두 사람뿐이겠소.”

계량이 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하오시면 나리의 존함은.”

“내가 바로 촌은이외다. 그 허접한 촌은 유희경이 바로 나외다.”

계량보다도 곁에 있던 춘섬이 놀란 모양이었다.

이름 난 시인이라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었으나 계량이 조선 땅에서 제일로 평가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밖에 명월이 없느냐. 어서 상을 들여오지 않고 무엇 하느냐!”

자신감에 차 있는 그 목소리는 물론 계량을 향한 소리였다.

들으란 듯 목소리를 높이고는 계량에게 고개 돌렸다.

“계량은 손님을 이리 무료하게 계시도록 할 일인가.”

말을 마친 춘섬이 서두르기 시작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춘섬이 나가자 계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 정식으로 나리를 뵈옵니다.”

온 정성을 다해 조신하게 절을 올리는 계량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유희경이 만면에 만족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렇게 칙사 대접을 받으니 오히려 내가 무색할 지경이로군요. 이제 그만 자리하도록 합시다.”

바로 그 순간 춘섬이 하인들을 시켜 상을 들여오고 있었다.

중앙에 상이 놓이자 유희경의 반대편으로 계량이 앉고 그 중간 부분에 춘섬이 자리 잡았다.

자리 잡기 무섭게 춘섬이 호들갑스럽게 호리병을 들어 유희경에게 기울였다.

“나리, 이곳 부안현의 기생 어미인 이 춘섬을 모른 체 하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호들갑스러운 춘섬의 행동에 촌은이 헛기침하면서 잔을 들었다.

“그나저나 내 어멈에게 거나하게 한잔 받아야 할 듯하이.”

잔을 채우는 춘섬이 계량을 바라보면서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 표정에 계량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붉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자, 너도 내 잔 한번 받거라. 그래야 내가 얼른 자리를 비켜줄 것 아니냐.”

계량이 잠시 사양의 표시로 고개를 돌렸다.

“사양하지 마시고 잔을 받으시오.”

이상하게 계량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 어디선가 꼭 보았음직한 모습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계량이 눈을 감았다가는 다시 살며시 유희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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