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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韓 이민자 아들, 美 판사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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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진주만 공습 하루 뒤 육군 입대

중령까지 복무하고 제대… 변호사 활동

아시아계 최초로 1971년 연방법관 임명

세계일보

1971년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처음 연방법원 판사가 된 한국계 미국인 허버트 최(1916∼2004).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을 간 한국인 부부 사이에 태어났다. 미 육군 홈페이지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는 소수민족 출신 판사도 많다. 당장 미 연방대법원의 대법원장·대법관 9인 중에는 흑인과 라티노(히스패닉) 출신이 1명씩 있다. 아시아계는 어떨까. 아직까지 아시아계 미국인 연방대법관은 없지만 하급심 법원엔 제법 많은 아시아계가 진출해 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연방판사가 탄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인 1971년이 처음이다. 해당 법관이 다름아닌 한국계 미국인이란 사실은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5월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AAPI)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13일 허버트 최(Herbert Choy·한국명 최영조) 전 제9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집중 조명했다. 특히 그가 미국에서 배출된 최초의 아시아계 연방법원 판사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허버트 최는 1916년 1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한국계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8년 하와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그는 공부를 무척 잘했다. 고향 하와이를 떠나 미 동부로 건너간 그는 1941년 명문 하버드대 로스쿨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법조인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뻔한 허버트 최의 인생 항로를 바꾼 건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이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외국군의 침략을 받는 것을 지켜보며 울분을 삼킨 그는 하루 만인 그해 12월 8일 미 육군에 입대했다. 대학 시절 학생군사교육단(ROTC) 과정을 거친 그는 소위로 임관했고 종전 이후인 1946년까지 복무했다. 계급은 대위에 이르렀다.

세계일보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 장면. 당시 하와이에 살던 허버트 최는 전투 이튿날인 12월 8일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법률 전문가답게 허버트 최는 1946년 미 육군 법무감실로 옮겨 법무관으로 활약했다. 영어는 물론 한국어와 일본어에 모두 능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꽤 오래 점령했던 일본과 한국에서도 복무했다. 예비군으로 옮긴 그는 육군에서의 최종 경력으로 중령까지 진급하고서 퇴역했다.

그 뒤 하와이에서 개인 변호사로, 또 일정 기간 동안은 법무법인(로펌) 구성원으로 일하며 주민들 사이에 신망을 얻은 허버트 최는 1957년 당시만 해도 미국의 정식 주(州)가 아니었던 하와이의 검찰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하와이가 주로 승격한 뒤로는 과거 그를 눈여겨봤던 하와이주 출신 상원의원에 의해 연방법원 판사 후보로 추천됐다. 결국 1971년 공화당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55세의 원숙한 허버트 최를 하와이주, 캘리포니아주 등을 관할하는 제9연방항소법원 판사에 임명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출신 첫 연방법관이 탄생했다는 소식에 하와이 주민들은 물론 미국 전역의 한인 사회가 크게 반겼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미국의 연방법관은 종신직이다. 허버트 최 역시 2004년 3월 88세로 타계할 때까지 판사직을 지켰다. 주한 미 대사관 측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AAPI 문화유산의 달을 기념해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 연방법관이자 미군에 몸 담기도 했던 한국계 미국 법조인 허버트 최 판사를 조명한다”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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