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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강경대에서 김귀정까지…기억해야 할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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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공안통치에 몸으로 맞선 분노와 희생은 어떻게 폄훼되었나

독재에 부역하다 87년 이후 스스로 권력 된 언론·사법 다시 봐야


한겨레

1991, 봄: 잃어버린 이름들을 새로 쓰다

권경원 글, 이강훈 그림, 정준희·송상교 보탬/너머북스·2만2000원

붉은 피, 가슴에 맺히는 ‘오월’이다. 41년 전 광주는 해마다 되새기는데, 30년 전 5월은 기억에서 잊혀져 간다. 34년 전 6월은 민주화 투쟁으로 기록되었으나, 처절한 죽음의 행렬로 점철된 1991년 봄은 “상처와 오욕의 시대로 남았다. (…)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과거로 잊히고 있다.”(<1991, 봄>에 인용된 김연수 소설 <내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재인용) “1991년 5월에 희생된 젊은 죽음들과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희생과 헌신의 가치보다 미안함 혹은 죄책감 등의 전도된 가치로 대상화된 채 묵혀 오면서 그해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게 돌이키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중심으로 “스무 살 언저리에 영원히 멈춰 버린 이름들을 기억하며” 다큐멘터리 <1991, 봄>을 연출·제작한 권경원 감독은 “그 이름들 곁에 잠시 넋 놓고 앉아 있고 싶던 마음들을 모아” 같은 제목의 책을 펴냈다. 대학 신입생으로 1991년을 살아낸 지은이는 “삶의 한복판에서 머뭇대고 있는 나를 그들의 죽음들이 대신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30년 내내 떨쳐 낼 수 없었기”에 1987~1991년의 일들을 되짚고 1991년 이후 불의에 맞서 목숨을 내던진 이들을 취재하고 기록했다. 이 책은 열사들을 불러 외치는 진혼곡이며 그 시대를 다시 살펴 해석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한겨레

화가 이강훈은 1991년 강경대 열사의 죽음 이래로 한 달간 희생된 이들과 그 이후 ‘1991년 봄’과 무관치 않은 죽음으로 내몰린 이들이 ‘꽃 피는 봄날 살았더라면’을 상상하며 철쭉 핀 교정, 벚꽃길, 보성 녹차밭 등을 배경 삼아 옅은 미소 띤 이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너머북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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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름들로 빼곡하다. 시작은 강경대다. 1991년 4월26일, ‘엄마, 아빠 학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금방 올게요’라는 메모를 남기고 시위 중 경찰에게 맞아 숨진 명지대 신입생이다. “115센티미터 길이의 쇠파이프로 강경대의 가슴과 어깨를 마구잡이로 내리쳤다. 130센티미터의 각목으로 왼쪽 다리를 가격하고, 허벅지를 난타했다. 100센티미터의 쇠파이프로 왼쪽 다리 부분을 다시 내리치고 발로 배를 계속 걷어차면서 머리를 잡은 채 경찰 진압봉으로 머리와 팔을 가격했다.”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이후 노태우는 ‘합법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3당 합당을 거쳐 공안통치에 나선 터였다. “당시 젊은이들의 시위에서의 부상은 일상이었다.” 지은이는 “1990~1991년 사이에 시위 도중 최루탄 등에 실명을 한 학생들이 학교마다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흔했다는 것”을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알게 됐다.

강경대 이후 죽음이 휘몰아쳤다.

1991년 4월29일 박승희. 전남대 5·18광장에서 ‘강경대 학형 살인만행 규탄 및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2만 학우 결의대회’가 열릴 때 학교 한구석에서 시너를 몸에 들이붓고 불덩이가 된 채 광장으로 뛰었다.

5월1일 김영균. 안동대 학생회관 앞에서 열린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동대인 결의대회’ 때 몸에 불을 붙였다.

5월3일 천세용. ‘힘을 내자! 열사들의 죽음 앞에서 나는 약해질 수 없다’는 마지막 메모를 남기고 학내 집회 도중 경원대 희망관 국기게양대에 올라 분신 뒤 투신했다.

5월8일 김기설. 재야단체의 젊은 간부는 여자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몸을 태워 결심한 길로 갔다. 유서대필 조작 사건으로 지인이 1151일 동안 감옥에 갇힐 것은 모른 채.

5월9일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은 강경대의 죽음에 항의 단식투쟁을 하다 안양병원에 옮겨져 의문사했다.

5월10일 윤용하. 스물두 살 대전 가방공장 보조공원은 전남대병원 중환자실로 사경을 헤매는 박승희를 찾아갔다가 못 만나고 다음날 전남대 강당 화장실에서 박승희와 같은 길을 택했다.

5월18일 이정순. 가락동 중국집에서 일하던 마흔 살 가톨릭 신자는 유서를 남기로 강경대 장례 행렬이 지나는 순간 연세대 굴다리 위 철길에서 몸을 태워 투신했다.

5월18일 김철수. 전남 보성고 3학년생은 학생회 주최로 열린 5·18 기념행사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다.

5월22일 정상순. 광양 제철소 노동자는 ‘노동자여 투쟁하라. 시민들이여 함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투쟁하자’는 유서를 남기고 전남대병원 영안실 옥상에서 분신하여 뛰어내렸다.

5월25일 김귀정. 비가 추적이던 날 성균관대생은 충무로 대한극장 건너편 진양상가 아랫길에서 시위대 위로 날아드는 최루탄과 사과탄을 맞으며, 백골단이 휘두르는 방패와 곤봉에 맞고 군홧발에 밟혀 쓰러지고 <한겨레신문> 취재 차량에 태워져 백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숨을 거뒀다.

강경대의 죽음 이후 한 달 동안 희생된 이들 11명을 포함해, 기억해야 할 1991년의 이름은 스물아홉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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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또 다른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로도 가득하다. “1987년 대선 이후 독재정권 시대와 다른 모습을 취하는 척이라도 했던 입법 권력과 행정 권력과는 달리 최종적 심판의 권력을 가졌던 사법권력”(송상교 변호사)은 잇단 열사들의 죽음을 폄훼하고 조작하는 데 적극적 역할을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탄압하는 도구였던 주류 언론”은 “마침내 주어진 자유와 민주를 도구화하여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오염”(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시킨다. <조선일보> 1991년 5월5일치에 “‘젊은 벗들’에게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는” ‘생명사상가’로 전향한 김지하, <중앙일보> 5월24일치에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한 서강대 총장 박홍의 뒤를 이어, 강신욱·신상규·윤석만·안종택·남기춘·임철·박경순·곽상도·송명석 검사의 수사와 노원욱·이영대·정일성(이상 1심)·임대화·윤석종·부구욱(2심) 판사 및 박만호·박우동·박상원·윤영철(3심) 대법관의 판결로 김기설의 죽음은 강기훈이 기획·방조한 것으로 조작됐다.

“한 나라의 역사를 애도의 역사로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그저 무심히 갱신되는 것처럼만 보이는 역사라는 도가니에서 인간 본연에 대한 소중한 질문 거리들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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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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