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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빨간 사과의 숨에 사랑을 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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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김승희 지음/창비(2021)

신문을 통해 접하는 여러 소식들에 다른 무엇보다 막막함과 답답함을 먼저 느낄 분들에게, 시 한 편을 건넨다. 이제 읽을 시는 오십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시인의 몸으로 건너온 이의 열한 번째 시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병에 잠식된 세계의 여기저기가 뜯겨나가고 그렇게 생겨난 틈마다 불안과 공포가 도사려 많은 이들의 다음을 위한 움직임을 가로막는 때, 누군가는 먼저 고립되어 외로움과 싸워야 하고 또 누군가는 고립될까 두려워 상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왜곡되게 지키는 때, “거대한 병동”과 같은 이 세계가 더 이상 ‘답이 없다’고 여겨지는 때,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닦는다.

“검은 바다에 표류하는 하얀 베개들,/ 세상이 온통 거대한 병동이니까요/ 하얀 방역복을 입은 의사들,/ 마스크와 마스크로 대화하는 마스크,/ 묵시록을 가득 실은 트럭이 다리 앞에 줄 서 있고/ 도시 곳곳엔 해파리를 닮은 괴물이 일렁거리며 나타난다/ 폐가 금세 하얗게 불타버렸어요, 재가 되었어요/ 이탈리아의 성모마리아상도/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도/ 소녀상도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어요// 세계는 다 함께 비참과 진혼의 다리를 건너간다/ 관 뚜껑으로 뗏목을 타고 간다/ 필사적으로 찢어지는 세계를 막아서며/ 들들들 들들들 이를 갈듯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 천사들이 외출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술을 뿌려라 꽃도 뿌려라/ 중력에 휘어잡혀 끌려가는 무겁고 캄캄한 몸/ 인류의 어느 사과밭에선 지금도 맹렬하게 사과가 자라고 있으리라// 홍로, 홍옥, 국광, 후지(부사), 아오리, 미야비, 감홍, 추광, 홍월, 슈퍼홍로, 홍로와 추홍의 교배로 만든 선홍, 후지와 쓰가루를 교배한 시나노스위트, 방울사과 메이플, 스칼렛서프라이즈, 파이어크래커, 골드러시, 알프스오토메, 아칸서스블랙, 섬머킹, 백설공주 독사과, 꽃사과 제네바, 스칼렛센터널, 미얀마후지, 로열부사, 후지와 세계일을 교배하여 화홍, 자홍, 후브락스, 갈라, 레드딜리셔스, 프르미에루주, 멜로즈, 핑크레이디, 로열갈라, 조나레드… 그리고 아직도 꿈속에서 만나는 이름 모르는 사과들// 지금은 봄의 초순, 사과는 이제 시작이다, 진혼의 다리를 건너가는 봄에 나는 빨간 사과의 이름을 부른다, 어느 산비탈 아래 이름 모르는 밭에서 아직도 맹렬하게 자라고 있을 이름 모르는 빨간 사과에 이름 모르는 사랑을 걸고 싶다”(김승희, ‘진혼의 다리를 건너는 봄에 빨간 사과의 이름을 부르다’ 전문)

오래전 어느 시인이 이름 모르는 별 하나하나에 아름다운 말을 하나씩 붙여 불러보았듯, 방금 읽은 시에서 시인은 제각기 다른 사과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 있으려는’ 이들의 숨을 헤아린다. 어느 ‘모르는’ 삶들을 계속해서 떠올리는 속에서야 이 “무겁고 캄캄한” 세계가 다르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땅이 낳아 땅으로 돌아가는 생명 중에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바로 그 이유로 살아 숨 쉬는 그 무엇도 함부로 내던져져선 안 된다고 여기는 이들의 “필사적으로 찢어지는 세계를 막아”내는 힘으로 우리는 “비참과 진혼의 시간”을 함께 건너가는 중이다. 다른 무엇이 아닌 사랑이 거기에 있다. 지금도 “맹렬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서로를 지탱하는 자리, 거기에. 시인을 따라 우리도 적어본다. 삶을, 사랑을. 진심을 멀리 보내지 않기로 한다.

문학평론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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