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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무너지는 고구려 (4) - 마지막 나당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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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23] 당군은 668년 정월부터 원정군을 충원하고 본격적인 고구려 공략에 나섰다. 당 고종은 우상(右相)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부대총관(遼東道副大總管)으로 삼아 이세적과 함께 원정에 나서게 하였다. 유인궤는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고 665년 백제 부여융과 신라 김인문을 데리고 태산 봉선에 참여하였고, 그 공으로 우상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래서 유인궤는 한반도 정세에 누구보다 밝았고, 신라 쪽 인물들과의 네트워크도 있기 때문에, 평양성 공격에 신라군을 동원하고 공조하기 위해서 등용한 듯하다. 실제 유인궤는 6월 12일에 신라 당항성에 도착하여 김인문과 협상을 하고 평양 공격을 위한 기일을 약속하고 돌아갔다. 이에 6월 21일에 문무왕은 김유신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신라군의 진격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살펴보겠다.

667년 고구려 영역 내에서 겨울을 지낸 이세적이 지휘하는 당군은 2월부터 다시 고구려 공략에 나섰다. 첫 공략 대상이 부여성이었다. 금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승세를 탄 설인귀가 부여성을 공략하여 함락시키고, 이에 부여천(扶餘川)의 40여 성이 모두 당군에 항복하였다는 사실은 전회에서도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당시 당군의 군사행동 범위로 볼 때 이 부여성을 길림 일대라기보다는 요원 일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렇다면 항복한 40여 성이 분포하는 부여천도 동요하(東遼河)에 비정될 것이다. 당군이 부여성을 함락시킨 시점은 '자치통감'에 의하면 668년 2월 28일이었다. 그래서 부여성 공략을 668년 당군의 첫 군사행동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렇지만 당측의 부여성 공략 기사에는 적잖은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자치통감' 기사에 의하면 이때 천남건이 부여성을 구원하려고 군사 5만명을 보냈는데 이세적 당군이 설하수(薛賀水)에 고구려군과 격전을 벌여 3만여 인을 전사시키며 물리쳤다고 한다. '구당서'에는 고구려 군사 5000명을 전사시키고 3만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전과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내용을 전하며, 또 이 살하수 전투가 2월 4일에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기록상으로는 부여성 함락보다는 좀 더 이른 시점에 살하수 전투가 종료되었는데, 이렇게 보면 5만명 고구려군은 이미 정월에 당군에 대한 공세적인 군사행동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군이 부여성을 구원하려다가 일어난 살하수 전투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이세적은 살하수 전투에서 승리하고 곧바로 대행성(大行城)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대행성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박작성과 더불어 압록상 하구의 요충성임은 분명하다. 즉 살하수와 압록강 하구 대행성으로 이어지는 이세적 당군의 진격로를 보면, 살하수의 위치 역시 압록강 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인다. '신당서' 고려전에는 '살하수(薩賀水)'로 기록되어 있다. 살하수는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살수와도 이름이 통하는데,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으로 비정되니까 압록강 이북의 살하수가 살수일 수는 없다.

이세적이 겨울을 어디에서 보냈는지 기록이 없지만, 신성이나 국내성쯤이 유력한데, 아무래도 당나라 영역과 연결되는 신성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신성에서 압록강으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살하수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사실 2월 28일에 당군이 함락시킨 부여성을 지금의 요령성 요원 일대로 본다고 하더라도, 당시 고구려 중앙정부가 이 부여성을 되찾으려고 5만 군대를 보냈다는 기록은 믿기 힘들다. 일단 압록강 전선에서 보자면 부여성은 신성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부여성으로 진격하려면 당군이 이미 장악하고 있는 신성과 소자하 일대를 통과해야한다. 비록 부여성 일대가 신성을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이라고 하더라도, 압록강 전선 방어가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에서 그 멀리까지, 한 사람의 군사가 아쉬운 판에 5만명이라는 대군을 보낸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상상하지 않을 일이다.

따라서 5만명 고구려군이 구원하려던 부여성은 압록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요충성이어야 한다. 이에 해당되는 가장 유력한 성은 지금의 요녕성 봉성에 위치한 오골성이다. 오골성은 요동 전선의 여러 성들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압록강 이북 최대 거점성이다. 당군이 압록강 이남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골성을 차지해야 한다. 668년 정월에서 2월 초에 걸쳐 벌어진 고구려군과 당군의 충돌은 오골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였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매일경제

박작성(호산산성)에서 바라본 애하와 압록강 /사진=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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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추정이 옳다면 고구려군이 대패한 살하수는 압록강의 지류로서 오골성 동쪽을 흐르는 애하(靉河) 혹은 오골성 북쪽의 초하(草河)에 비정할 수 있다. 필자는 애하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다만 오골성을 설인귀 등이 공격한 부여성으로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왜냐하면 40여 성이 분포하고 있는 부여천을 오골성 일대에서 마땅하게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645년 당 태종이 친정할 때에도 평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공략해야 할 우선 순위로 오골성을 거론할 정도로 당군의 지도부에서도 너무 잘 알고 있는 성이기 때문에, 오골성 이름을 부여성으로 착오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전회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666년 당이 남생을 구원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낸 이후 당군의 행적에는 불합리한 기록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 부여성 관련 기록에도 적지 않은 착오와 혼란이 뒤섞여 있다고 판단한다. 그동안 필자 나름대로 합리적인 사료 비판을 시도해왔는데, 이 부여성 관련 기사들은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로서는 설인귀 등이 공략한 부여성과 설하수 전투가 벌어졌던 부여성은 서로 다른 성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아직 겨울이 채 지나가지 않은 668년 정월부터 당군과 고구려군은 치열하게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행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은 압록강에 머무르면서 고구려 영역 내에 있는 당군을 결집시켰다. 신성에서 소자하유역을 경유하여 국내성에서 남생과 만났던 글필하력도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 하구에서 이세적과 합류하였다. 당군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으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한편 신라가 담당한 남부 전선은 어떠하였을까?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유인궤와 평양성 공격의 기일을 정한 문무왕은 6월 21일에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였고, 선발대로 김인문 등에게 한성주의 병력 등을 이끌고 평양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하고, 문무왕 자신도 27일에 서라벌을 출발하였다. '삼국사기' 김인문전에는 이때 동원된 신라군이 20만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다소 과장이 있더라도 문무왕의 친정이니만큼 10만명 이상의 최대 규모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7월 16일에 문무왕은 한성에 도착하였으며,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군 선발대는 이미 평양 인근의 영류산에서 당군과 합류하였다. 문무왕은 한성에 머물면서 신라군의 본대를 북상시켰으며, 신라군은 사천(蛇川) 벌판에서 고구려군과 격전을 벌여 물리치고 북진하였다. 이 사천은 연개소문이 662년 2월에 당의 방효태 군을 궤멸시킨 사수 전투가 벌어진 평양 합장강과는 다른 지역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서흥강 중류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나중에 평양성이 함락된 후에 문무왕이 신라 장수들을 포상할 때 사천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들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진 점을 보면, 사천원 전투 상황은 전혀 알 수 없지만 매우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앞서 신라군이 아직 북상하기도 전인 6월 무렵에 고구려 남부전선의 요충지였던 대곡성과 3경의 하나인 한성(漢城)이 당군에 항복하였기에, 남부전선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남부전선의 최후 항전인 사천원 전투라도 있어서 고구려 마지막 자존심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셈이다. 다만 백제 황산벌 전투는 계백의 충정과 5천 결사대의 장렬한 최후로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자리를 차지했지만, 고구려의 사천원 전투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서 더욱 비장하게 느껴진다.

667년 마지막 겨울을 지내면서 고구려 중앙정부는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북방 전선에서는 압록강을 사수하고 오골성을 지키기 위한 일전을 준비했고, 남부 전선에서는 사천에서 신라군의 북상을 막기 위한 최후의 저지선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5만 군대를 투입한 설하수 전투에서도, 사천원 전투에서도 모두 패배하였다. 압록강 전선이 무너지고, 사천 전선이 뚫리면서 평양성은 나당연합군에 포위되는 운명에 처하였다.

고구려의 최후가 다가왔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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