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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아침햇발] ‘난입자들’에게 빚진 한국 민주주의 / 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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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세영

논설위원

한겨레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작전 직후 노먼 소프 기자가 촬영한 안종필군(앞)과 문재학군의 주검. 문군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이다. 옛전남도청복원추진단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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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한 건물 안, 속절없이 밀려든 그날의 여명은 죽음의 빛, 절망의 빛이었을 것이다. 19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복도에서 안종필과 문재학은 웅크리고, 드러누워 죽음을 맞았다. 앳된 얼굴에 짧은 머리, 흑백의 얼룩무늬 교련복이 열여섯살 소년 시민군의 신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외신기자 카메라에 담긴 두 고교생의 주검을 지난주 신문 지면에서 마주쳤을 때, 내 기억은 어느새 41년 전 5월의 늦은 오후, 예배당 장의자에 차려진 소박했던 밥상 주변을 더듬고 있었다.

그때 나는 광주 변두리의 신축교회 목사관에 살았다. 1978년 지원동의 장로교회에 부임한 아버지는, 이듬해 교인들을 설득해 큰길가에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1980년 봄 우리 식구는 예배당 지하에 마련된 목사관으로 이사했고, 채 두달이 되지 않아 5·18이 터졌다. 군인들이 총을 쐈다는 소식과 함께 무장한 시민군이 동네에서 목격되기 시작했다.

교회는 4층 높이 종탑까지 달려 있어 사주 경계와 방어에 용이했다. 카빈총을 든 시민군들은 예배당을 거점 삼아 시가전에 대비했다. 시 외곽을 봉쇄하고 진압 작전을 준비하던 계엄군과 간헐적 교전이 이어졌다. 그날은 계엄군 재진입을 하루이틀 앞둔 날이었을 것이다. 오전부터 교회 주변에 총성이 요란했다. 길 건너 남국민학교 쪽에 진출한 계엄군과 교회의 시민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늦은 오후, 아버지가 청년들 예닐곱을 데리고 내려오자, 어머니가 서둘러 밥을 짓고 라면을 끓였다. 장발에 국방색 야전상의를 걸친 사내 하나가 밥술을 뜨다 말고 나를 부르더니 100원짜리 동전 몇 개를 손에 쥐여주었다. 은색 동전의 쇠비린내와 함께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동여맨 까끌한 붕대 감촉이 전해왔다.

그들은 교회에서 보던 대학생 형들과는 말투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 이유를 나는 와이엠시에이(YMCA) 다니던 외삼촌이 몇년 뒤 건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보고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책은 시민군의 출신 배경을 이렇게 적었다. “10대 후반과 20대가 주류를 이루었고, (…) 그들의 직업 대부분은 노동자, 목공, 공사장 인부 등 직접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거나 구두닦이, 넝마주이, 부랑아, 일용 품팔이 등이었다.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들도 많았고 어쩌다 예비군복을 입은 장년층도 있었다.”

죽음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도 총을 내려놓지 않았던 그 절박함의 실체를 당시의 나로선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상황을 이해하게 만든 건 스무살 무렵 읽은 시 한 편이었다. 시인 황지우는 1980년대 초반 광주일고와 경북고의 야구경기 관람기를 빌려 쓴 ‘5월 그 하루 무덥던 날’에서 광주의 시민군을 편파 판정에 격분해 필드로 뛰어든, 겁없고 무모한 청년들에 비유했다.

“숫제 윗옷을 벗어버린 두 청년은 114M 외야석에서 구장으로 뛰어내린다./ …/ 주심에게 항의하러, 외야 쪽에서 홈으로 달려들어온 휴가병은, 전경 경비대에 그대로 안긴 채 들려나간다./ …/ “아마, 제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들도 다 저런 사람들이었을 거야.””

정해진 절차를 밟지 않고, 자격과 근거도 갖추지 않은 채, 앞뒤 재지 않고 필드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난입’이었다. 동전 쇳내와 까끌한 붕대 감촉으로 남은 내 기억 속 ‘장발 시민군’, 카빈총을 들고 도청 창가에서 생의 마지막 새벽을 맞이했을 안종필·문재학의 선택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층노동자, 부랑아, 고교생. 애초부터 필드로 난입하지 않고선 목소리 낼 기회 자체가 박탈된 이들이었다. 그들의 삶과 말은 누구에 의해서도 대표되지 않았고, 국가권력엔 정치사회적 동원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국가권력의 야만적 폭력에 분노해,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역사의 그라운드 한복판에 총을 들고 난입한 것이다.

항쟁은 진압됐지만, 그들이 하나뿐인 목숨과 맞바꾼 ‘정치적 존재 증명’은 군부의 총칼 앞에 숨죽인 소시민적 존재들을 ‘시민’이란 정치 주체로 고양시켰고, 7년 뒤 제헌헌법이 문자로써 선취한 시민적 공화의 이념을 불모의 대지에 착근시켰다. 한국 민주주의는 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난입자들’에게 빚진 민주주의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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