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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이건희 컬렉션 보자"…강원도 소도시에 사람들이 몰렸다[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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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최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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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미술관에 걸린 고 이건희 회장에 대한 감사 문구.(박수근 박물관은 전시관 내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으나 취재를 위해 협조를 얻어 촬영했다.) /사진=최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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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선생이 잠들어 계신 이곳 강원도 양구 박수근 미술관에 선생의 혼이 깃든 귀한 작품을 기중해주신 고 이건희 회장님, 홍라희 여사님, 이재용 부회장님, 이부진 사장님, 이서현 이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구 5만명의 작은 도시에 지어진, 전후의 가난한 대한민국을 살아낸 한 화가를 기리는 미술관은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가족의 기증으로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박수근 미술관에 기증된, 일명 '이건희 컬렉션' 얘기다.

박수근 화백(1914~1965)이 묻힌 강원도 양구군에 지어진 이 미술관은 이 회장 유족이 기증한 유화 4점과 드로잉 14점을 공개하는 특별전 '한가한 봄 날, 고향으로 돌아온 아기 업은 소녀'를 이달부터 시작했다. 전시관 한 쪽 벽면에는 이 회장이 기증한 작품만큼이나 큰 크기로 기증자에 대한 경의를 담은 문구를 게시하고 있었다.


평일 오전에도 줄 이은 관광객… "이건희 컬렉션 보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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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관람객들. (박수근 박물관은 전시관 내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으나 취재를 위해 협조를 얻어 촬영했다.)/사진=최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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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인적이 드문 평일 오전인데도 미술관은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관람객들로 붐볐다. 코로나19로 인해 관람객의 연락처를 기록하는 방명록을 슬쩍 보니 서울, 경기, 춘천, 세종 등 다양한 시도의 주소가 눈에 띄었다.

박수근 미술관에 따르면 이건희 컬렉션을 시범공개한 1일을 기점으로 관람객은 이전의 2~3배를 유지하고 있었다. 휴일인 어린이날에는 258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동시 관람객 수를 제한하기 위해 입장객을 30분 단위로 받는 사정을 생각하면 놀라운 수치다.

관람객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희끗희끗한 흰 머리를 뒤로 넘긴 어머니와 딸부터 가족 단위로 나들이 온 꼬마 손님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한 관람객들이 이 곳을 찾았다.

이날 어린 두 딸과 미술관을 방문한 박진하씨(37, 강원도 춘천시)는 "이건희 컬렉션을 보기 위해 아이들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왔다"며 박씨는 "주말에는 관람객이 몰릴 것 같아 평일에 일부러 시간을 낸 것"이라고 말했다.


홍라희 여사 아이디어로 만든 자작나무숲… 그 꽃말처럼 돌아온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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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라희 관장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자작나무 숲. /사진=최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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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특별전 개최 배경이 적힌 벽면이 관람객을 맞는다. 2004년 처음 연을 맺은 삼성 가와의 인연이 지금의 기증으로까지 이어졌다는 내용이다.

"2004년 10월, 당시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었던 홍라희 여사가 박수근 미술관 개관 2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을 때 박수근 동상 옆 빨래터 주변 사유지를 매입해 자작나무 숲을 조성할 것을 제안했고 그 때 기증해 식재한 자작나무 숲은 명소로 자리매김 했다. (중략)'당신을 기다립니다'는 꽃말을 가진 자작나무의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진 듯 박수근 미술관으로 박수근의 유화 4점과 드로잉 14점이 돌아왔다.(후략)"

전시관 곳곳에서는 다양한 기증, 기탁자들에 대한 존경이 묻어났다. '산'을 기탁한 정기용씨, 유화가 한 점도 없었던 박수근 미술관에 '굴비'를 기증한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 등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단연 가장 많은 작품을 기증한 건 이 회장의 유족이었다.

이 회장의 소장품을 처음 공개하는 특별전인만큼 전시관의 한 켠에는 이 회장 유족이 기증한 유화 네 점만을 모아놓은 공간이 마련돼있었다. '아기 업은 소녀', '농악', '한일', '마을풍경' 등 박수근 화백의 대표작들 아래로 '고 이건희 회장 가족 기증'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그림마다 설치된 보안 장치도 눈에 띄었다.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S1의 제품이 박수근 미술관의 모든 작품들을 지키고 있었다.)

관람객들은 손을 대지 않는 한, 수십 센티미터 앞에서 박 화백의 유화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박 화백의 유화는 돌 위에 그린듯한 특유의 우둘투둘한 질감이 특징적이다. 사진으로 포착되지 않는, 거칠고 순박한 그의 붓터치가 눈 앞에 펼쳐졌다.


뜯어진 스케치북 자국까지 그대로 보관된 이건희 컬렉션… 작품 사랑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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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 유족이 기증한 한일(왼쪽)과 두 남자. 한일은 박 화백이 직접 제작한 액자까지 함께 미술관으로 왔다. 드로잉 작품의 경우 뜯어진 스케치북 요철까지 보존됐다. (박수근 박물관은 전시관 내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으나 취재를 위해 협조를 얻어 촬영했다.)/사진=최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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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의 컬렉션은 보존 상태가 훌륭했다. 이를테면 덧칠의 두께만 무려 5cm에 달하는 한일의 경우 박 화백이 직접 제작한 액자 틀까지 함께 박수근미술관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엄선미 박수근미술관장은 "대부분 기증품은 전시 전 우리 미술관에서 틀을 따로 만들어 전시한 것이지만 한일은 액자도 박 화백이 직접 제작한 것"이라며 "나무로 틀을 짜고 사포로 손질한 다음 유화 물감을 묻혀서 일부러 때를 묻혔다"고 했다.

박 화백의 드로잉 '마을 풍경' '두 남자'는 스케치북에서 뜯어낸 요철 자국까지 그대로 전시됐다. 드로잉은 유화 작업 전 연필로 그리는 밑그림이다. 채색이 된 완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드로잉까지 수천만원을 주고 사모으기는 쉽지 않다. 엄 관장은 "드로잉 작품들은 상당히 보존이 잘 된 상태로 미술관에 왔다"며 "중성지에 싸여 테이프로 포장돼있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극진한 미술품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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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업은 소녀.



희소성 측면에서도 이 회장의 컬렉션은 남달랐다. 이 회장이 기증한 또 다른 작품 '아이 업은 소녀'는 피사체가 정면을 보는 것이 특징이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머리를 힘겹게 쪽진 소녀가 갓난 아이를 포대기로 업고있었다. 몸은 고되지만 얼굴만은 엄마처럼 인자한 표정을 짓고있다. 엄 관장은 "박 화백은 수시로 스케치북을 들고다니며 장터나 길가에서 본 아낙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렸는데, 그러다보니 정면을 보는 피사체가 잘 없다"며 "박 화백의 아이 업은 소녀 시리즈 작품 10점 중 정면을 그린 것은 2점뿐"이라고 설명했다.

박수근 미술관은 그의 유화 한 점 없이 개관한 작은 미술관이었다. 매년 양구군의 예산으로 작품 한두 점 정도는 입수할 수 있었지만 이번 이 회장의 기증처럼 한 번에 많은 작품이 들어온 경우는 없었다. 수억을 호가하는 그의 그림들이 돌고돌아 양구로 돌아오자 주민들은 함께 기뻐했다.

인근에서 시래기 음식 전문점을 하는 김모씨(80)는 "박수근 화백이 힘들게 살던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도 양주에 많다보니 박 화백은 군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며 "이런 와중에 이 회장이 통 크게 그림들을 기증했다니 매우 기쁜 한편 코로나19로 어려워진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필로그]

박 화백은 '서민 화가'다. 그의 그림은 주로 노상이 배경이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길 가며 흔히 볼 법한 아이, 아낙네였다. 한 평생 가난과 싸우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의 작품은 후대에 와서야 제대로 인정받았다.

광복 전후, 한국 전쟁의 폐허를 견뎌야 했던 박 화백의 눈에 소녀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회장 컬렉션 중 하나인 아이 업은 소녀를 보며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애가 애를 업어 키운다'며 모든 소녀가 '간난이'로 불렸던 시절이었다. 누추한 행색에도 아이를 등에 진 소녀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가난의 고됨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동시에 엿보였다.

전시관 바깥으로 나오니 어린 관람객들이 미술관 앞 정원에서 뛰놀고 있었다. 박 화백의 그림 속 소녀들이 힘들게 키워낸 미래가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특별전 제목처럼, 한가한 봄 날이었다.

최민지 기자 mj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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