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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마침내 70년 만에 만나는,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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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8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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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의 1951년 작 <한국에서의 학살>. 합판에 유화로 그렸다.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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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18일, 당대 세계 현대미술의 대명사이자 최고 거장으로 군림하던 70살의 파블로 피카소는 뜻밖의 문제작을 그려냈다. 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작은 마을 발로리스에서 부인 자클린과 오손도손 살던 그가 지구 정반대편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터의 학살을 소재로 한 가로 210㎝, 세로 110㎝의 대작을 완성한 것이다.

1·4 후퇴 이후 서울이 북한 인민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의 수중에 다시 떨어지고 유엔군은 기약 없이 남쪽으로 내몰리던 시기에 그려진 이 작품에 작가는 ‘한국(조선)에서의 학살’이란 제목을 붙였다. 물론 전장에서 직접 사생한 건 아니다. 종군기자들의 사진을 참고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타고 황량해진 들녘을 배경으로 참상을 상상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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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낮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 피카소의 대작 <한국에서의 학살>을 관객들이 지켜보고 있다. 작품 주위에는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직원 두명과 폐쇄회로티브이 카메라 2대를 배치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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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고갱이는 화면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대치하듯 자리한 알몸 여인들과 갑옷 입은 장정들의 표정과 자태다. 고통과 공포로 얼굴이 일그러진 두명의 여인과 체념한 듯 눈을 감은 다른 여인,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는 소녀, 그들 품으로 달려드는 두명의 소년과 안긴 아이, 밑에서 노는 아이. 그들은 모두 알몸이고 무방비 상태다. 반면 오른쪽에는 철갑을 갖춰 입은 군인들이 기계장치 같은 총을 여성과 아이들에게 겨누고 있다. 그들에게는 어떤 감정이 서린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걸작 <1808년 5월3일>에 보이는 프랑스 나폴레옹군의 스페인 시민 학살 그림의 도상을 다른 구도로 재연한 것이다. 연약한 약자와 이를 짓밟는 가해자의 근접 대치 장면은 고야가 창안한 근대회화의 획기적인 구도였고, 그를 평생 스승으로 흠모하며 수없이 옮겨 그렸던 피카소는 마침내 한반도의 전쟁으로 무대를 옮겨 재해석했다. 여성들 얼굴에는 독일 공군이 스페인 마을에 가한 기총소사 학살의 참상을 고발한 자신의 14년 전 대작 <게르니카>의 절규하는 군상들의 면모가 살아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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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자신의 작업실에 <한국에서의 학살>을 모로 세워놓고 그 앞에서 생각에 잠긴 피카소의 모습. ©2021 Sucession Pablo Picasso SACK(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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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획사 비채아트뮤지엄 주관으로 지난 1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에서 개막한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는 한국 애호가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한국에서의 학살>이 내걸렸다. 이번 특별전은 피카소 컬렉션 가운데 으뜸으로 인정받는 프랑스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의 주요 작품 110여점을 국내에 처음 선보인다. 특히 입체파 작가의 면모만 강조해온 국내 전시의 관행을 깨고, 청색시대와 입체파 시기, 고전주의 회귀 시기, 초현실주의 시기, 도예작업 시기 등 변화를 거듭했던 피카소의 전 생애 작품을 아울러 보여주는 역대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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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조각들을 이어붙인 입체파 계열의 아상블라주 작품으로 20세기 초 서구 미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1913년 작 <기타와 배스병>. 보험 평가액이 전시 출품작들 가운데 가장 높은 800억원으로 책정됐다고 한다. ©2021 Sucession Pablo Picasso SACK(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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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나온 피카소의 1951년 도자기 작품 <목신이 장식된 작은 술병>.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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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학살>뿐 아니라 나뭇조각들을 이어붙인 입체파 계열의 아상블라주 작품으로 20세기 초 서구 미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1913년 작 <기타와 배스병>, 분석적 입체화 화풍의 대표작 <만돌린을 든 남자>, 1930~40년대 연인 도라 마르와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풍성한 색채와 유연한 선으로 그려낸 여인 연작, 말년에 심혈을 쏟은 다종다양한 도자기 그림과 조형물 등 눈여겨볼 수작이 수두룩하다. 청년 시절인 1900년대 초부터 황혼기인 1960년대까지 예술 여정을 연대기별로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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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작 <시계를 찬 여인>. 당시 그가 사귄 젊은 새 애인 마리 테레즈의 자태를 풍성한 색채감과 유연한 곡선의 윤곽으로 묘사한 수작이다.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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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1931년 만든 청동상 <여인의 상반신>.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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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학살>은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민간인 학살 장면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이미지와 프랑스 공산당의 주문에 따라 그려졌다는 통설 탓에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물론 서구 화단에서도 반미적인 이념화, ‘선동적 그림’으로 매도당하거나 외면당했던 곡절이 깃든 그림이다.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이 그림 대여를 교섭했으나 ‘함께 교류할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며 거절당했던 일화도 전해진다. 비채아트뮤지엄의 전수미 관장은 “국내 미술계의 프랑스통인 서순주 기획자가 국립피카소미술관과 직접 교섭해 주요 작품들을 엄선했다”며 “코로나19로 힘들고 지친 시민에게 피카소의 명품 원화들을 직접 관람하면서 힐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관람료는 성인 2만원, 청소년 1만3000원, 어린이 1만1000원이며, 전시는 8월29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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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1808년 5월3일>을 패러디한 중국 현대미술가 유에민쥔의 1995년 작 <처형>. 극한의 공포와 긴장이 감도는 고야의 원작과 달리 벌거벗은 채 멍하니 웃으며 처형을 받아들이는 중국인 군상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 중국 사회의 무기력증을 조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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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미술관 3층의 중국 현대미술가 유에민쥔 개인전(9일까지)에는 고야의 <1808년 5월3일>을 패러디한 1995년 작 <처형>의 복제화가 전시돼 있어 피카소 작품과 견줘가며 감상하는 재미도 누릴 수 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비채아트뮤지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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