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기업 요청대로 규제 완화했더니 화학사고 늘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정미란 환경운동연합 생활환경국 국장(hjk2722@kfem.or.kr)]
잊힐 만하면 언론에서는 연일 화학사고 소식이 들려온다.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충남 논산 LCD 제조공장에서 화학물질이 폭발했다. 현재까지 1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8명이 다쳤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올해 1월 파주 LG디스플레이 화학물질 누출사고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40대 노동자 한 분도 결국 지난 3월 12일 사망했다. 함께 쓰러진 노동자 한 분은 지금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 "기업 죽이는 규제 완화해 달라"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참사, 2012년 불산 누출 사고와 같이 대규모 화학 사고를 계기로 국가 차원에서 화학물질 안전관리가 강화되는 듯싶었다. 산업계는 기업에 대한 과도한 규제라며 반발하고 나섰지만, 그래도 국민의 따가운 눈총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그리고 개별 기업들도 스스로 안전에 대한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겨우 한 단계씩 조금씩 진전을 보이던 화학물질 안전관리가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2019년 일본 수출 규제를 시작으로 지난해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기업과 보수언론들은 국민 안전과 직결되는 화학물질 안전관리를 과잉 규제라며 주장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단체들은 노골적으로 "기업 죽이는 규제"라며 노동환경 관련 정부의 각종 규제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정부도 기업 지원을 명분으로 '규제 혁신'이라는 용어로 경제단체 건의에 따라 규제 완화해 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 사이 화학물질 안전망에 뚫린 구멍은 점점 커졌다.

구멍의 시작은 2019년 일본 수출 규제 사태에서 시작된다. 일본 수출 규제 당시 정부는 유해화학물질 취급하는 시설(사업장) 인허가 처리기한을 75일에서 30일 내로 단축하고, 신규 화학물질 159종에 대해서 안전성 시험자료 등을 생략했다. 그 이후,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지난해 4월 코로나19 사태로 화학물질 관리가 또다시 완화됐다. 기존의 인허가 취급시설 인허가 단축과 함께 일본 수출 규제 사태 당시의 규제 완화 품목(159종)보다 딱 2배 늘린 338종으로 화학물질 수를 확대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규제 완화 품목에 대해서 영업비밀이라 공개할 수 없다는 정부의 입장이다. 지난해 10월, 환경연합은 정부에 규제 완화 품목에 대해 정보 공개를 청구했다. 산업통상자원부(산자부)와 환경부는 시민단체의 정보공개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해화학물질 안전관리 완화 품목 일체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답변이었다. 산자부는 산업 전략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공개가 어렵다고 답변했다. 환경부는 산자부 소관이기에 해당 목록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이후 언론과 시민사회, 국회가 지속해서 공개를 요청했다. 정부는 전략 물자라는 차원에서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우리는 '화학물질 비밀은 위험하다'는 뼈아픈 경험을 했다. 하지만 화학물질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 기업과 정부의 행태로는 그 어떤 안전도 담보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최악의 화학 사고로 꼽히는 2012년 구미 불산 누출 사고 당시 유독물질인 불산 가스가 10톤가량 나왔다. 그렇지만 정작 지역주민이나 노동자는 해당 공장이 불산을 취급하는지도 몰랐다. 수천 명의 피해자를 양산한 가습기 살균제 유독물질에 대해서도 기업과 정부는 '영업비밀'을 주장했다. 정부는 코로나19 대책으로 지난해 4월 화학물질 정기검사를 6개월 유예해준 뒤, 9월에 또다시 3개월 연장했다. 법에 따라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은 위험한 시설이기 때문에 매년 정기적으로 안전 검사를 받아야 한다. 코로나 대책으로 1~2년마다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검사마저 유예해준 것이다. 게다가, 올해부터 화학물질 취급시설에 경미한 변경에 대해서 '선 가동 후 시설 검사'까지 허용하고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칠 판이다.

프레시안

▲ 지난해 12월 경영자총연합회 등 경제단체는 기자회견을 열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경영자총연합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규제 풀어달라더니 화학사고 더 늘어

최근 환경연합이 분석한 화학사고 건수를 보면 더 암울하다. 환경연합이 화학물질안전원 누리집(☞ 바로 가기)과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2014년 1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화학사고를 분석했다. 구미 불산 누출사고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계기로 재개정된 화학물질 안전법들이 2015년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2015년 1월 화학물질 안전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자 화학사고 발생 건수는 감소하는 추세였다. 법 시행 직후인 2015년 112건의 화학사고가 발생했으나, 2019년에는 62건으로 45%가량 감소했다. 또한, 화학 사고는 법 시행 이후 매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2015년 112건이었던 화학 사고가 △2017년 87건, △2018년 69건, △2019년 62건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올해까지 정부의 화학물질 규제 완화가 본격화되면서 2020년에는 96건으로 전년 대비 절반 이상(54.8%)이나 증가했다.

지금까지 화학 사고의 감소는 국내 화학물질 관리체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였다. 정부 차원에서 화학물질 취급시설 안전기준 강화를 통해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위험요소를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기업은 법제도에 따라 화학 사고를 대처할 수 있는 역량 강화와 함께 대응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난 한 해 규제 완화 조치를 시행하자마자 한순간에 공든 탑이 무너지듯 화학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어떻게 일순간에 둑이 무너진 것처럼 화학 사고가 증가할 수 있을까? 시민사회에서는 노후화된 산업단지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국내 화학 산업 기반시설들은 대부분 1970년대 초에서 1980년대 가동되기 시작했다. 적게는 20년에서 많게는 50년 이상 가동되었다. 시설 노후화에 따른 화학 사고의 위험성은 상존해 있다. 원자력 발전소 포함 각종 시설에는 사용 연한이 있다. 화학 산업단지의 경우 가동 시한이나 사용 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다. 그 결과, 노후화된 사업장을 가동하면서 가스 배관과 각종 밸브에 대해 개보수하고 교체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노후화된 산업단지에서 지속해서 작업 중에 유해물질 폭발, 유출 사고 등으로 노동자들의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화학 사고를 일으킨 LG그룹만 보더라도, 사업장 내 배관 및 밸브 교체 작업 중 화학물질 누출, 화재 사고가 전체 화학사고 중 60%를 차지했다.

프레시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안전 강화 골든타임이라더니

지난해 4월 코로나19 대책으로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화학물질 규제 완화 방침을 발표한 같은 달, 정세균 총리는 제1회 기반시설관리위원회에서 "바로 지금이 노후 기반시설 안전 강화의 골든타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후 1년이 지났다. 정 총리 말대로 노후 산단을 비롯해 화학물질 취급시설 관리 감독을 강화해도 부족한 상황에서, 오히려 정기적인 안전점검까지 유예해주며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지 짚어보아야 할 때이다.

[정미란 환경운동연합 생활환경국 국장(hjk2722@kfem.or.kr)]

- Copyrights ©PRESSia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