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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엄마 아닌 괴물이었어요" 살아남은 아이는 천륜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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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

어른이 된 '아동학대' 생존자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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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트라우마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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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니라 괴물 같았어요. 부모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는 차고 넘치죠."(A씨·26) "'우리 집이 가난해서 그렇겠지, 엄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렇겠지.' 학대를 견디다가도 이런 합리화가 먹히지 않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유튜브 채널 '사이다 힐링' 운영자 썸머)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잘 알지 못 하는 범죄. 바로 아동 학대입니다. 얼마 전 입양아 '정인이'가 양부모 학대에 숨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습니다. 하지만 제2의 정인이는 전국 곳곳에 있습니다. 몇몇 극단적인 사례만 언론에 보도될 뿐 대부분은 신고조차 되지 않곤 합니다.

아동 학대는 대부분 부모·자녀 사이에 발생합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학대받는 아이들의 상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회에선 흔히 부모와 자식을 두고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하늘의 도리', 천륜(天倫)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학대받는 아이에게 천륜이란 지긋지긋한 올가미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밀실팀은 어른이 된 뒤 부모와 천륜을 끊기로 결심한, '살아남은' 아동학대 피해자 3명을 만났습니다.



# 매일 시퍼런 멍이 몸과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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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밀실팀과 인터뷰하고 있는 A씨. 석예슬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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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 A씨는 부모와 연락하지 않은 지 2년이 됐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아픈 기억뿐입니다.

"말을 듣지 않아서", "싸가지가 없어서", "성적이 안 좋아서"라는 이유로 매질이 이어졌습니다. 구둣주걱과 단소, 전깃줄 등으로 맞은 A씨 몸에는 늘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시험 기간에 게임을 한다는 이유로 엄마가 목을 졸랐다. '사람이 목을 졸리면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했죠.

물론 폭력에 맞서도 봤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모를 잡아먹는 X", "걸레 같은 X"과 같은 날 선 욕설이 이어지면서 A씨는 곧 체념했습니다.

"일단 (얻어맞은) 피부나 근육이 아프니까요. 더 상처가 날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제게 삶을 줬다는 것에 한 순간도 감사한 적이 없어요.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거라고도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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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월 된 입양 딸 정인 양을 학대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양부모의 5차 공판이 열린 7일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 입구에서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양부모의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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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리는 것만큼 흔하고 무서운 게 정서적 학대입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9년 학대피해 아동 보호 사례 3만 건 중 정서 학대는 7622건으로 신체 학대(4179건)보다 많습니다.

비교적 눈에 띄는 신체 학대에 반해 정서 학대는 모호한 경계에 놓여있습니다. 피해자는 자신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고, 가해자도 훈육과 학대를 오갈 때가 많습니다. 또 다른 아동학대 피해자인 오지은(35)씨의 엄마가 "자식을 위해 노력한 것밖에 없다"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죠.



# 내 아이 낳고서야 학대당한 걸 알았다



"어릴 때부터 밤마다 '내일 아침엔 눈 뜨고 싶지 않다'는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어요. 내가 나약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됐습니다."

유튜브 채널 '사이다 힐링'의 운영자이자 책 『나는 왜 엄마가 힘들까』를 쓴 썸머(가명·35)의 말입니다. 그는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고 나서 자신이 정서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엄마는 그를 마치 '트로피'처럼 여겼습니다. 아이가 행복한 지보다 내 아이의 외모·학벌·직업 등이 부모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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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밀실팀과 인터뷰하고 있는 썸머. 석예슬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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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큰 썸머는 어느덧 다섯 살 아이 엄마가 됐습니다. "난 우리 아이가 이렇게 예쁜데, 우리 엄마는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었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엄마와의 관계를 돌아봤다고 합니다. 낮은 자존감과 우울증의 원인이 부모의 정서 학대였단 걸 뒤늦게 깨달은 그는 연락을 끊기로 했습니다.

여덟 살 아이를 키우는 작가 지망생 오지은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씨는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불안증, 편집증과 관련된 우울증의 시작이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던 엄마로부터 언어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네 아빠만 아니었어도 너도 안 생겼다' '너를 낳는 게 아니었다' '결혼하기 싫었는데 네가 생기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고 쏘아붙였죠. 오씨는 "정서적인 학대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 환경에 차차 적응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 어릴 적 상처는 커서도 아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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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학대는 어릴 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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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아이의 마음은 그 시절에 그대로 머무릅니다. 어른이 된 후에도 깊은 트라우마로 남죠. 그래설까요.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썸머는 "다른 사람한테 'No'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거절하면 내가 위험해질 수 있고, 학대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A씨도 "친구 관계나 이성 관계에 있어 감정을 수용하고 표현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최근 A씨의 엄마는 '남편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네게 풀었던 것 같다'며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A씨는 여전히 어두운 기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지은 씨도 학교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버스를 타는 것도, 지하철을 타는 것도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며 "부모님이 싫지만 부모님 없이 살아가는 게 힘든 존재가 돼 버렸다"고 털어놓습니다.



# 그래도 살아남아 상처를 마주하다



밀실팀이 만난 학대 피해자들은 어렵게 '천륜'을 끊었습니다. 과거를 벗어나 미래로 나가기 위해서죠. 하지만 '그래도 부모인데, 어떻게 그러냐'는 수군거림은 그치질 않습니다.

학대에 무지한 사람들의 편견은 피해자들이 아픔을 터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썸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오씨가 "한국 사회가 부모의 생각과 자식의 생각을 서로 말하고 토론하는 사회로 성장했다면, 35살이 된 나도 아직까지 방황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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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밀실팀과 인터뷰하고 있는 썸머. 석예슬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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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지워지지 않는 어린 시절이지만, 이들은 결국 살아남았습니다. A씨는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썸머와 오지은 씨는 새로운 가족을 꾸리고, 글을 쓰고,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중입니다.

힘겹더라도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당당하게 바라보기. 먼저 일어선 피해자들이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전하는 위로의 첫 마디입니다.

"단지 운이 나쁠 뿐이에요. 그런데 모든 면에서 다 운이 나쁠 수는 없잖아요. (아픔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A씨) "부모가 원하는 삶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평생 날갯짓 한번 못해볼 수는 없잖아요" (오지은씨)

백희연·박건 기자 baek.heeyoun@joongang.co.kr

영상=석예슬·장유진 인턴, 백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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