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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이슈 양승태와 '사법농단'

임종헌의 예고편…이민걸·이규진 사법행정권남용 첫 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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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에 보석 심증 확인은 중대한 범행"

중앙일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남용' 재판에서 처음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왼쪽)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 상임위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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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남용’ 사건에서 첫 유죄 판결이 나왔다.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부장 윤종섭)가 박선숙·김수민 전 국민의당 의원 정치자금법 사건 등의 재판부 동향을 파악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로 이민걸(60·사법연수원 17기) 전 대법원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면서다. 이규진(59·18기)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통합진보당 국회의원들의 지위확인 소송 등에 개입한 혐의가 인정돼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민걸 전 실장은 국회의원 재판 주심 판사에게 관련 사건의 보석 허가 여부와 심증을 확인해 보고하라는 위법·부당한 지시를 했다”며 “재판의 공정성에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중대한 범행”이라고 밝혔다.

통합진보당 의원 사건과 관련해 함께 재판에 넘겨진 방창현(48·28기)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와 심상철(64·11기) 전 서울고등법원장은 무죄가 선고됐다.



◇ 국민의당 의원 정치자금법 재판 관여 혐의…유죄



재판부는 이번 사건에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를 ① 법원행정처의 개별 판사에 대한 지시·권고(직권남용)와 ② 실제 재판부의 판결에 부당한 영향을 미쳤는지(권리행사방해)로 나눠 ① ② 모두 성립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전 실장이 2016년 10월~11월 서울서부지법 나모 기획법관을 통해 국민의당 국회의원들의 정치자금법 사건 재판과 관련해 보석 허가 여부 등 재판부의 심증을 보고 받은 부분은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형식적으론 국회에 대한 민원 사무를 처리하기 위한 자료수집 행위로 보이지만, 재판의 공정성에 의심을 불러올 수 있는 행위로 재판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며 “이 전 실장의 지시는 해당 기획법관의 직무 범위를 벗어난 일을 하게 한 것으로 필요성과 상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이 전 실장이 2016년 박병대(64·12기) 당시 법원행정처장의 지시로 옛 통합진보당(통진당) 의원들의 국회의원 지위확인 소송 항소심 재판부 소속 이동원 서울고법 부장판사(현 대법관)을 접촉한 부분은 무죄로 판단했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통진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은 헌재가 했지만, 국회의원 지위 확인 권한은 대법원에 있다”는 입장을 정했다. 재판부는 “이 전 실장은 이런 입장을 이 부장판사에게 전달한 부분은 직권남용에 해당하지만, 이 부장판사는 이와 무관하게 자의로 기각 결정을 했다”며 “재판 결과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고 봤다.

반면 이규진 전 양형위원은 광주지법 행정1부 등 두 건의 재판 결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해 유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규진 전 위원의 범행은 어느 하나 뺄 수 없이 중대한 범죄”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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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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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인권법연구회 및 인사모 와해 시도 ‘유죄’



재판부는 법원행정처가 2017년 2월 13일 법원 내부망 코트넷에 공지한 ‘전문분야연구회 중복가입 해소조치’는 임종헌(62·16기)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지시에 따른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을 와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연구회 관리 담당자인 이 전 실장이 이를 알면서도 법원행정처 소속 심의관에게 문건을 보고 받고 관련글 게시를 지시한 건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고 했다.

재판부는 “당시 행정처의 중복가입조치 해소조치의 의사결정권자는 임종헌 전 차장”이라며 “이 같은 행위는 민주주의의 요청에 반하는 것으로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연구회 중복가입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대법원 예규가 있었기 때문에 공지를 보고 탈퇴한 판사들에게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이와 관련 한 법조계 인사는 “이 전 실장이 직권남용을 한 건 맞지만 연구회를 탈퇴한 판사들은 의무 없는 일을 한 게 아니라는 이상한 결론”이라며 “임 전 차장의 책임을 부각시키려는 논리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 같은 재판부 담당 임종헌 전 차장 재판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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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으로 재판 중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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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1심은 사법행정권남용 사건에서 처음으로 유죄를 인정한 재판으로 기록되게 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포함해 기소된 전·현직 법관 14명 가운데 앞서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신광렬·조의연·성창호 부장판사, 임성근 전 부장판사 등 6명은 무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선고 공판은 지난달 18일과 이달 11일 두 차례 연기 끝에 열렸다. 이날 오후 2시 시작해 선고까지 5시 40분까지 3시간 40분 걸렸다. 윤 재판장이 사법행정권의 목적과 권한, 법원행정처 소속 심의관의 직무를 상세하게 설명한 뒤 각 피고인별로 구체적인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 적용 여부를 밝혔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양승태 대법원의 컨트롤타워였던 법원행정처의 일련의 지시를 사법행정권에 속는 재량으로 볼지, 재판 개입으로 볼 것이냐 사이에서 재판 개입으로 봤다.

이 전 실장이 2015년 8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임종헌 전 차장 밑에서 일했다는 점에서 같은 재판부가 담당한 임 전 차장 재판은 물론 박병대ㆍ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재판부도 양형 사유에서 “이 전 실장 등은 개인적 이익을 추구한 게 아니라, 최종 의사결정권자였던 임종헌 전 차장의 지시를 따랐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실제 이날 법정에선 임종헌 전 차장의 이름이 50여 차례나 등장했는데, 당사자인 피고인 이 전 실장보다도 많이 언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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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권 남용 재판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왼쪽부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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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종섭 전례없는 6년째 중앙지법 유임…코드인사 논란도



윤 재판장은 “‘인사모’ 관련 대응 문건 작성 등 일부 지시는 이 전 실장도 거치지 않고 임 전 차장이 심의관에게 직접 작성했다”고 밝혔다.

윤종섭 재판장은 올해 법원 정기 인사에서 서울중앙지법에 6년째 유임돼 주목을 받았다. 그의 전례없는 장기 유임을 놓고 사법행정권남용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 김명수 대법원장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란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임종헌 전 차장이 지난해 재판부 기피 신청을 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전 실장은 지난달 28일 판사 연임을 포기해 자연인 신분으로 이날 재판에 참석했다. 윤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는 동안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이따금씩 눈을 감았다. 항소 여부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 전 실장은 “재판이 진행 중”이라며 말을 아꼈다.

이유정·김수민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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