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도구로 서술한 오페라
로저 스크러턴
<바그너의 파르지팔>
영국 보수주의 사상가 로저 스크러턴이 펴낸 <바그너의 파르지팔>의 부제는 ‘구원의 음악’이다. 바그너는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는데 구원에 대한 오페라를 썼다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든다.
<파르지팔>에 다양한 기독교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페라의 주무대인 몬살바트성에 주둔하는 기사단은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성배(聖杯)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이들이 등장하는 1막의 성체성사 신은 무려 30분간 계속되는데 압도적인 남성 합창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바그너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성금요일 아침에 <파르지팔>을 구상했다. 3막에는 성금요일의 마법이라는 유명한 신도 있다. 지금도 부활절 즈음에 <파르지팔>을 공연하는 경우가 많다. 바그너와 깊은 교분을 나누던 니체가 <파르지팔>의 기독교적 색채에 격분해 절교를 선언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독교에 대한 통념과 맞지 않는 점들이 여럿 보인다. 여주인공 쿤드리는 윤회를 겪었다. 왕 암포르타스가 성체성사를 집전하고 파르지팔은 쿤드리에게 세례를 베푸는데 모두 성직자가 아니다. 아물지 않는 상처로 고통받는 암포르타스는 예수의 재림과 구원에 대한 희망보다는 ‘연민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순수하고 어리석은 이’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비전에 의지한다.
스크러턴에 따르면 바그너는 기독교를 하나의 형식이자 도구로 이용했을 뿐, 그 이면의 메시지는 기독교적 구원과는 무관하다. 그렇다고 해서 바그너가 기독교를 완전히 부정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그너 역시 인간의 생은 죄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인간은 끊임없이 구원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파르지팔>에서 구원은 모든 인간적인 가치를 넘어선 절대적 신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품는 연민에서 출발한다. 바그너는 19세기 많은 서구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의 철폐가 아니라 종교의 인간화를 추구했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 철학에 깊이 몰두해 있었다. 니체에 따르면 당시 쇼펜하우어에 가장 정통한 인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흔히 비관주의 철학자이자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살펴보면 기독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의 도구로 활용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는 인과율과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표상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은 고통의 늪에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표상의 세계는 인간이 최선의 노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죄와 육신의 세계인 셈이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필연적 고통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표상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직관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여기서 쇼펜하우어와 바그너 사이의 유사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파르지팔>은 오페라이므로 극의 철학적 배경보다는 음악에 우선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스크러턴은 책 후반부에 <파르지팔>에 대한 상세한 음악 분석을 담아 놓았다.
전희상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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