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염지혜 작가 '미래열병'의 한 장면. 황폐화된 지구에 혼자 남은 사이보그는 스스로 묻는다. “정해진 미래에, 그려진 미래에, 아름다운 그림에, 한 마리 흉측한 해충인가 나는?” (출처 염지혜의 vim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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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대학원 시절 비디오 아티스트 염지혜 작가의 리서치 작업을 도운 적이 있다. 작품의 이름은 '미래열병'이었다. 작가는 기계와 속도, 향상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미래파(Futurism)가 파시즘과 닿아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오늘날 과학기술을 말하며 자기들끼리 미래로 가려는 사람들과 전 세계의 우익화 현상을 연결 짓고 싶어 했다. 어느 날 리서치 과정에서 작가는 물었다.
"사이보그가 되면 어떨 것 같아요?"
재밌고 멋질 것 같았다. 더 멀리 보고 더 멀리 뛸 수 있겠지. 바다 깊이 잠수할 수도 있겠지.
작가는 대답을 듣더니 자신은 우울할 것 같다고 답했다. 지금도 가진 것에서 차이를 느끼는데 그게 몸에서까지 드러나면 너무 비참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불평등이 몸에까지 확장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작업의 방향을 뒤처지는 사람들로 잡았다. 과학기술이 선사하는 달콤한 열매를 따먹으며 누군가 미래로 갈 때 여전히 현재 혹은 과거에 남은 사람들, 더 나은 기술을 가질 자원이 없어서 망가지고 녹슬고 철 지난 기계를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작품은 여성의 몸을 한 사이보그가 모두가 떠나고 황폐화된 지구에 혼자 남아 춤을 추며 끝난다.
그로부터 2년 후. 지구에는 정말 열병이 돌고 말았다. 미래와 향상과 속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이니 "미래열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코로나에 있어서 가장 무고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 노숙인, 노인, 쪽방촌 사람들, 정신병원에 갇혀 평생 사는 사람들, 콜센터 노동자… 이동도 소비도 적어 탄소발자국을 가장 적게 남기는 사람들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막 시작되던 지난해 3월 1일 오전 울산 중구 전통시장이 텅 비어 있다. 울산=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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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라는 '미래열병'에 아빠와 엄마가 남겨졌다
나는 코로나 이후 세상에 잘 적응한 편이다. 처음엔 일이 끊겼으나 모든 일을 온라인 기반으로 전환하며 괜찮아졌다.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었는데 웬걸, 부모가 모두 실직하고 말았다.
변화는 아빠에서 시작됐다. 시간을 돌이켜 30년 전, 경기 구리시 전통시장 초입에 작은 인쇄소가 문을 열었다. 부모는 도장을 파고 인쇄를 하며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빈곤층에서 탈출했다. 이들에게 그 공간은 엄청난 자부심의 장소다. 하지만 인쇄업은 곧 쇠퇴의 길을 걷는다. 예전에는 문서를 깔끔하게 작성하기 위해 인쇄소에 왔다. 지금은 누구나 스스로 컴퓨터로 문서 파일을 만든다. 입력도 수정도 출력도 쉬워졌다. 오프라인에서 전처럼 판촉물을 많이 쓰지도 않는다. 시대는 빠르게 바뀌었고 발 빠른 인쇄소는 온라인 기반으로 장사를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못했다.
아빠는 이제 집 근처 조그만 공간에서 전처럼 문서 무더기를 잔뜩 쌓아놓고 돋보기로 낡은 컴퓨터 화면을 살펴보며 지낸다. 바탕화면에는 '하미나 작가의 글' 같은 폴더가 있다. 나는 가끔씩 심부름을 하러 불려 가는데 한참을 고생했다며 물어보는 문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인 게 많다.
그런 아빠가 연금술사 같다고 느낀 적이 있다. 연금술사는 연금술사인데 피펫으로 마이크로 단위의 실험 물질을 옮기는 시대의 연금술사. 기술 발전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아빠가 인쇄소를 접은 곳에 엄마는 떡볶이집을 열었다. 이름하야 돌다리 떡볶이(동네 이름이 돌다리다). 돌다리 떡볶이는 코로나를 버티고 버티다 건물주의 바람대로 지난 설 결국 문을 닫았다. 삼십 년간 한 군데에서 장사를 해왔는데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나가게 됐다. 장사를 못 하는 상태의 엄마는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 가족은 철저히 개인 플레이를 하는 집이었다. 참견도 간섭도 안 하고 알아서 살라 주의였다. 이것이 배부른 소리고 한때의 이야기임을 알게 됐다. 알아서 잘 산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나의 부모는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디지털 세상에서 완전히 멀어진 상태였다. 내가 트위터를 하고 과학기술을 다루는 글을 쓰는 동안 부모는 국세청 홈페이지 로그인을 하지 못하고 사업자 등록증을 출력하지 못해 소상공인을 위한 지원금을 한 차례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디지털 격차. 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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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상'에 뒤처지면 지원금 받기도 어려워
'효'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나는 효심이 별로 없다) 그보다는 디지털 리터러시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완전히 소외시키고 있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치사하게 굴었던 것이다.
국세청 홈페이지. 내게도 어려운 이 사이트를 나이 든 사람과 장애인이 도대체 어떻게 쓰라는 걸까. 이름도 비슷비슷한 각종 재난지원금의 신청 대상과 시기 등 중요한 정보는 온라인에 집중돼 있다. 복잡한 안내 사항 속에서 내 것을 찾기도 어려운데 제대로 물어볼 창구도 없다. 전화 연결은 어렵고 연결이 되어도 해결이 잘 안 된다.
이번 주 부모를 대신해 소상공인 지원금을 신청하기 위해 다음의 과정을 거쳤다. 지원 신청 홈페이지에서 사업자 번호를 넣는다→ 해당 사업자가 행정명령을 잘 지킨 곳인지 확인을 받으라고 한다→ 행정명령 이행 확인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사업자등록증을 출력해서 스캔해 업로드해야 한다→ 출력을 하려고 국세청에 로그인을 하려는데 공인인증서가 필요하다→ 아빠는 당연히 공인인증서가 없다. 후 하 후 하 숨을 고른다.
공인인증서 발급 역시 스마트폰이 필요하다. 왜 모두가 스마트폰 사용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나? 아빠는 20년째 애니콜 폴더폰을 쓴다. 그렇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20년간 쓴다. 심지어 잘 작동한다. 바꿔드린다고 해도 극구 거부한다. 그는 멀쩡한 물건을 트렌드에 맞춰 갈아치우지 않는다.
이런 것을 보면 젊은이로서 차분하게 잘 설명하며 디지털 세계를 점차 소개하면 될 텐데 현실은 "도대체 요새 이런 걸 누가 쓴다고! 진짜 구질구질하게!"하고 화를 내며 문 닫고 쾅으로 자주 끝이 난다. 부모가 더 나은 걸 누리고 살지 못하는 상황이 화가 나는데 그걸 부모에게 푸는 것이다. 한편 정작 부모는 그다지 열받아 하지 않는다. 주변 배운 애들은 억울한 일이 생기면 항의하고 분노하며 국가야 고쳐라 하지만, 전통시장 사람들은 이보다는 좀 더, 팔자 탓을 한다. 국가가 자신을 위해 뭘 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잘 안 하는 것 같다. 여러 번의 무력감 속에서 만들어진 생존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예술운동 미래파는 속도와 기술, 산업화된 도시, 자동차, 비행기 등 근대 문물을 찬양했다. 미래파 작가의 다수는 파시즘을 지지했다. 미래파 화가 Fortunato Depero의 Skyscrapers and Tunnels(Gratticieli e tunnel), 1930. 구겐하임 미술관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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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을 중심으로 과학을 다시 보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보통 과학기술을 이야기할 때 성장과 향상과 속도를 이야기한다. 인간을 개조해 고치고 향상시키겠다는 말은 손상과 훼손이 있는 인간을 불완전하게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염 작가의 질문에 했던 대답을 이제 쑥쓰러워한다.
과학기술을 다르게 이용할 수도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이전에 과학기술을 사용하던 방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지금 똑똑히 보고 있지 않나.
앞선 연재에서는 과학 지식이 온전히 '사실'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왔다. 모든 과학 지식은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특정한 가치에 조응하며 생산된다. 이제 이 정도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러면 다시 물어볼 수 있다. 과학기술이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에 관한 문제란 말인가?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과학기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과학기술학자 브루노 라투르는 과학을 사실물(matter of fact)이 아니라 우려물(matter of concern)로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을 과학과 사회, 기술과 정치, 물질과 문화가 뒤엉킨 총체로서 보기 위해서다.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 마리아 푸이그 들 라 벨라카사(Maria Puig de la Bellacasa)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돌봄물(matter of care)을 말한다. 돌봄을 중심으로 과학을 다시 생각하자는 것이다.
성장과 향상을 위한 과학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지구를 돌보는 과학기술을 하자는 말이다. 드라마 '스타트업'에서도 인공지능 기술로 시각 장애인 보조 기술을 만들지 않나. 우리는 너무 한쪽 방향의 과학기술에만 익숙하다. 그래서 과학기술이 원래 그런 줄 알고 통째로 부정하려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띵꺼밧. 더 나은 과학기술을 위해 상상력을 발휘할 때이다.
나는 혁신을 부르짖으며 모든 규제를 구태로 보는 사람들을 다소 의심스럽게 본다. 과학기술은 남겨진 사람들, 느리게 걸어오는 사람들, 때로는 아파서 누워 있기만 하는 사람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주체에서 밀려나 함부로 대해진 동물과 지구. 이런 것들에 응답해야 한다. 쌩쌩 달리는 과학기술에서 미처 손을 붙들어 매지 못하고 떨어진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고 지르밟고 가는 것이 최첨단이고 혁신이라면 나는 그것을 야만이라 부르겠다.
하미나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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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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