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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단독] “신용도 보지 않는 대출 상품 만들라”…이재명 시중은행에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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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1000만원, 10년간 연 3%
이자는 만기 때 한꺼번에 갚는 방식
신용불량자 대출 가능 여부도 검토
은행권 "비상식적…깜깜이 부실 초래"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기본소득, 기본주택에 이어 ‘기본대출’ 정책 드라이브를 걸면서 시중은행에 관련 대출 상품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이에 금융권 안팎에서 적잖은 파문이 일고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시중은행에 특정 정책성 금융 프로그램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이재명 지사의 대선 캠페인에 은행도 사정권에 들었다는 판단에서다.

은행 입장에서는 이 지사와 경기도의 요구를 수용하면 상당한 손실을 각오해야 하는 대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고, 거꾸로 거부하게 되면 유력 대선 주자와 그 지지자들의 공격을 각오해야 한다. 중앙정부 사무인 금융정책을 지자체가 펴면서 발생하는 권한 침해 논란은 덤이다.

이 지사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기본대출’ 정책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 제도의 핵심은 신용도에 상관없이 일정 금액을 장기 저리로 빌려주자는 것이다. 저신용자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발생하는 손실은 정부나 지자체가 부담케 하자는 게 이 지사의 제안이었다. 지금까지는 정책 아이디어 수준이었다면, 이번에는 실제 실현에 나선 것이다.

◇ 최대 1000만원, 만기 10년, 연 3%에 대출 실행

5일 은행권에 따르면 최근 경기신용보증재단은 지난달 말 각 시중은행에 ‘경기도형 기본대출 시범 운용(안)’을 보냈다. 신용도에 상관없이 1인당 500만~1000만원을 10년간 연 3% 금리로 빌려주는 금융상품 개설을 놓고 경기도와 협의하자는 것이다.

지원 대상은 전체 경기도민이지만, 경기도는 우선 만 25~26세 또는 결혼 적령기(남성 만 33~34세, 여성 만 29~30세)의 경기도민을 대상으로 시범 운용할 예정이다. 대출 방식은 만기에 한꺼번에 상환하는 방식과 마이너스통장 방식으로 나뉘는데, 이 중 만기 일시 상환의 경우 원금과 이자를 한꺼번에 갚을 수 있도록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전체 지원 규모는 1조~2조원으로 책정됐다.

조선비즈

이재명 경기도지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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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는 저신용자에 저금리 대출을 하면서 발생하는 이자 차액과 미상환 부실 자산은 경기신보가 메워주겠다는 방침이다. 정부 대신 민간은행이 낮은 금리로 저신용자에게 대출을 내주게 한 뒤, 정부가 시중금리와 정책금리의 차이만큼을 보전해주는 이차보전 제도를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경기신보가 보증서를 발급해 부실이 날 경우 경기신보의 돈으로 대출 원금을 메워주겠다고 계획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상품 운용 가능 여부 ▲상품 운용 시 예상금리 ▲이차보전으로 필요한 예상 금액 ▲만기에 이자를 한꺼번에 납부하는 상품 운용이 가능한지 ▲추가 10년 만기 연장이 가능한지 등에 대한 의견을 은행에 요청했다.

◇ 은행권 "기본 무시한 비상식적 제도…부실 불가피"

익명을 요구한 은행권 관계자들은 경기도의 요구에 난감하다는 반응이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지방자치단체가 금고은행(지자체 자금을 관리하는 은행)과 손을 잡고 금융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시중은행 전부에 특정 금융 지원 프로그램 동참을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기본대출은 비상식적 제도"라며 "은행은 고객의 예금을 이용해 대출을 내주는 만큼 정확히 위험성을 따져 취급 여부를 결정하고 금리를 산정해야 하는데, 이 기본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다른 관계자도 "민간은행을 산업적 시각이 아닌 정부 산하 기관으로 봐야 나올 수 있는 개념"이라며 "정부가 해야 할 부분이지 민간은행이 할 일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은행들은 경기도가 제안하는 방식이 대규모 부실 자산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봤다. 게다가 이 손실을 경기도가 메워줄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나타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아무리 이차보전을 약속받는다 해도, 실제 상품을 운용해보면 손실 규모가 예상과는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경기신보가 100% 보증을 서준다는 조건으로만 그나마 상품 운용이 가능한데, 보증서 비율이 조금이라도 낮아지면 상품 출시는 어렵다"며 "게다가 보증서가 담보해주는 비율이 높을수록 보증료율이 높아지는데, 기존 정책상품 등을 보면 이 비용 역시 은행이 일부 부담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실제 경기신보가 제시한 시범운용안 곳곳에는 대출의 부실률을 높이는 요인들이 있다. ‘신용도 판단정보 등 불량거래정보 보유자에게 대출이 가능한지’를 묻는 항목이 대표적이다. 즉 은행은 물론 제2금융권에서도 대출을 받기 어려운 이들에게 은행 문턱이 개방되는 셈이다. 만기를 추가로 10년 연장할 때 이자를 내지 못할 경우 그만큼 신규 대출을 또다시 내줄 수 있는지를 묻는 항목도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자 납부는 대출에 대한 부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표"라며 "은행은 이자 납부가 일정 기간 연체될 경우 해당 대출을 부실 처리하고 그에 따른 대응책을 세우는데, 이렇게 만기에 한꺼번에 이자를 납부할 경우 대출의 부실 여부를 알 수 없어 곤란하다"고 말했다. 최근 금융당국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지원을 위해 은행권에 만기 연장과 이자상환 유예를 요청했을 때, 은행권이 이자만큼은 미뤄주기 어렵다는 입장을 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은행권에서는 경기도의 기본대출 추진 과정도 잘못됐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금융당국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이렇게 직접 은행에 상품 개발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금융위원회가 있는데도 이를 건너뛰고 은행에 정책 상품을 요구하는 것은 월권"이라며 "정부와 당 차원에서 정리된 뒤에 은행에 요청해야지, 유력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책을 실현해달라고 찾아오기 시작하면 정쟁에 휘말릴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이에 대해 이 지사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그런 요구를 은행에 한 적 없다"라며 "경기신용보증재단이 은행에 보낸 공문은 은행에 가능 여부를 문의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또 "(경기도가 추진 중인 기본대출을 검토해) 은행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안 하면 그만"이라고 밝혔다.

이윤정 기자(fact@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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