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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이건희 회장은 왜 휴대전화 15만대를 불태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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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극장]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제35화 삼성 휴대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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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 동안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폰만큼 사람 사는 모습을 바꾼 기술이 있을까? 정보통신기술은 우리가 물건을 사고, 남들과 이야기하고, 일하는 방식을 모두 바꿨다. 그 가운데 휴대폰은 더 친근하다. 아침부터 밤까지 항상 곁에 두고 쓰는 물건이라 그렇다. 삼성전자는 이런 흐름 속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세계 시장 2위까지 올라갔다. 이제는 애증 어린 존재가 되어버린 삼성 휴대폰의 스마트폰 이전까지의 초창기 발자취를 살펴보았다. /해설 이요훈

불량률 무려 11% SH-770

휴대전화 최초로 ‘화형’

그러곤 모토롤라 아성 무너뜨려

다양하고 새로운 제품으로

세계시장 2위까지 치고 올라가

아이폰 이전엔 모든 게 좋았다

한겨레

<한겨레> 1993년 7월18일치 6면 기사. 1988년 시작한 이동통신 서비스는 1993년부터 조금씩 쓰는 이가 많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휴대폰 시장이 얼마나 커질지 아무도 몰랐다. 당시 예상했던 2000년도 휴대폰 사용자는 약 500만명. 그러나 실제 2000년도 휴대폰 가입자는 약 2500만명이다.(※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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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7월18일, <한겨레>는 “휴대용 전화기 시대가 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 최근 몇년 동안 해마다 100% 정도의 시장 확대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삼성, 금성, 현대 등 국내 가전 3사와 미국 모토롤라, 유럽산 수입업체 등 모두 17개 업체들이 내놓은 20여개 모델이… 1500억원 규모의 시장 쟁탈에 나서고 있다”(1993년 7월18일치 7면)고 썼다. 1984년에 차량이동전화, 1988년에 휴대전화 개통이 시작되고, 전화기 가격 인하와 더불어 93년에야 전국 74개 시 전역과 읍 등에서 서비스를 제공한 탓이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 어렵지만, 휴대전화 서비스가 시작될 무렵 국산 휴대폰은 없었다. 다행히 88올림픽에 맞춰 삼성전자에서 최초의 국산 휴대전화 ‘SH-100’을 선보였지만, 성능이 나빠 별로 팔리지 않았다. 우리 기술력은 부족했고, 시장은 한동안 외국 기업이 장악하고 있었다. 반전은 삼성의 신경영 선언 이후, 1994년 10월에 출시된 ‘SH-770’부터 일어났다. 이 폰은 휴대전화 최초로 ‘화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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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2년 5월31일치 16면에 실린 SH-300 휴대폰 광고. 휴대용 무선전화기라고 쓰인 게 인상적이다. 판매량은 모르지만 유럽에 수출도 했다고 한다. 당시 삼성전자는 자체 개발한 휴대폰과 일본에서 수입한 제품, 카폰과 휴대폰 겸용 제품, 무선호출기를 함께 팔았다. 중간에 SH-200 모델도 개발했으나 성능이 떨어져 출시를 포기했다.(※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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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4년 5월25일치 20면. 독특했던 삼성 휴대폰 SH-700 광고. 휴대폰 대리점 사장님들 얼굴을 모았다. 당시 삼성전자는 무조건 모토롤라를 고집하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찾고 있었다. 신문에 휴대전화 할부판매 광고도 자주 실렸던 시대다.(※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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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5년 1월13일치 24면 광고. 애니콜 광고에서 인기를 얻은 문구는 많지만, 한국 지형에 강하다는 광고문구만큼 판을 바꾼 글은 없다. 당시 휴대폰 이용자들이 불편하게 여기던 통화 품질 문제를 제대로 찔러서 성공했다.(※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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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큰 문제였던 통화 품질 문제를 보강했던 이 기기는, 많은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지인들에게 선물했을 정도다. 문제는 제품 품질. 불량률이 무려 12%에 가까웠다. 1995년 3월 <한겨레> 기사를 보면 이에 화난 이 회장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반품된 휴대전화 15만대 등을 쌓은 다음 불을 지르기에 이른다.

어떻게 됐을까? 1995년 8월18일 <한겨레>에는 이런 기사가 적혀 있다. “격전을 거듭하고 있는 휴대폰 시장에서 마침내 모토롤라의 11년 아성이 무너졌다. 17일 휴대폰 업계에 따르면 지난 7월 한달 동안 삼성전자의 휴대폰 애니콜이 시장점유율 51.5%를 차지해 모토롤라를 누르고 시장점유율 1위에 뛰어오른 것으로 나타났다.”(“삼성휴대폰 ‘애니콜’ 1위/7월 시장점유율 51.5%” 1995년 8월18일치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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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이 보급되던 초기에는 휴대 공중전화로 많이 쓰였다. 무선호출기로 연락이 오면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는 식이다. 휴대전화로 바로 연락하는 일에 그리 익숙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행여 상대방을 방해하지 않을까 조심하기도 했다. 참고로 1997년까진 휴대폰으로 한글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 1997년 12월 삼성전자 제공 사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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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한국은 2세대 이동통신 표준으로 시디엠에이(CDMA) 방식을 쓰기로 한다. 당시 세계에서 많이 쓰이던 지에스엠(GSM) 방식과는 달랐지만, 쉬운 길을 버리고 자체 기술력을 쌓는 기회를 택했다. 거꾸로 남들이 안 쓰기에, 외국 회사가 만든 휴대폰이 한국 시장에 들어오기도 어려웠다. 기술 보호 장벽을 친 셈이다. 그저 휴대폰 사용을 보여주고 있을 뿐인데, 신기한 듯 쳐다보는 행인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1996년 이용호 기자가 촬영한 비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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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제품만큼이나 실패한 제품도 많다. 사진은 1998년에 나온 삼성 폴더형 애니콜 전화기. 반으로 접어 크기를 줄인 제품이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분명히 다른 인기 제품과 비슷해 보이는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다. 삼성전자 제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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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15일 강창광 기자가 찍은 휴대폰 이용자 비컷이다. 휴대폰 사용자가 많아지고, 더 싸고 작고 가벼워지면서, 점점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다. 연락을 위해 자주 들여다보게 되면서, 예쁘게 꾸미거나 겉으로 보이게 들고 다니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가 개인 정체성과 연결된 경우는 처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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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문제에 집중하고, 품질 관리에 신경 쓴 게 적중했다. 이후 국내 2세대 이동통신 방식이 시디엠에이(CDMA) 방식으로 결정되면서 외산 휴대전화가 들어오기 어렵게 되고, 여러 광고가 인기를 얻으면서 삼성 애니콜은 국내 시장 1위 휴대폰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다.

여기서 끝나면 좋겠지만, 세상은 무정한 법이라, 1997년에는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와 대규모 디(D)램 업계 구조조정이 찾아왔다. 달러가 필요해진 삼성은 미국 시장 진출을 모색했고, 미 통신업체 ‘스프린트’를 통해 휴대폰을 팔 수 있게 됐다. 이때부터 세계 휴대폰 시장 점유율에 삼성이 등장하지만(당시 스타티스타(Statista) 기준, 1997년에는 기타, 1998년에는 2.7%),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외국 소비자는 삼성을 모방 제품을 만드는 회사 정도로 생각했다. 여기서 두번째 반전이 등장한다. 한국과 유럽에서 망한 폰이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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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SCH-3500 전화기. 2001년 미국 소비자전문지 <컨슈머 리포츠>에 의해 최우수제품으로 선정됐기도 했다. 한국과 유럽에서 인기를 얻지 못해, 삼성전자가 미국 출시를 망설인 걸 스프린트에서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일화가 있다. 삼성전자 제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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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3500’은 휴대폰 뚜껑을 위로 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휴대폰이다. 신선하긴 했지만, 때를 잘못 만난 탓인지 한국과 유럽 시장에서 크게 실패했다. 다른 나라에선 실패했는데 미국에선 큰 인기를 끌었다. 미국 스프린트 통신사의 대표 상품으로 1999년부터 2년간 600만대가 넘게 팔렸다. 덕분에 삼성은 모방품을 만드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벗고, 새롭고 멋진 휴대폰을 만드는 회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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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휴대전화가 빠르게 보급된 데에는 1997년 상용 서비스를 시작한 개인휴대통신(PCS)이 큰 역할을 했다. 휴대폰 가격이 떨어진 점도 있지만, 과도한 단말기 보조금을 지급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공짜폰이 등장했다. 덕분에 무선호출기 사용자가 대거 휴대전화로 넘어왔다. 1999년 장철규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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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출시된 애니콜 햅틱폰. 전체 화면을 터치로 조작할 수 있는 휴대전화로, 스마트폰이 출시되기 전까지 이런 풀스크린 터치폰이 인기를 끌었다. 사실 기술적인 면에서 언제라도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초기 아이폰의 칩을 만든 회사도 삼성전자다. 박미향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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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휴대폰 통화료가 비쌌기에, 통화는 자제하고 문자메시지 단말기로 이용하는 사람도 많았다. 세계에서 드물게, 한글 특성을 반영한 쉬운 문자 입력 방식을 만든 덕에 쓰기도 쉬웠다. 위 사진에 있는 단말기는 애니콜 SCH-X120으로 추정된다. 안팎에 액정 화면 두개를 달고 있으며, 간단한 무선인터넷을 쓸 수 있었다. 그때는 무선인터넷 이용료가 매우 비싸서, 보름 정도 썼는데 370만원이란 요금을 청구받은 중학생이 자살하는 일까지 있었다. 2001년 6월 강창광 기자가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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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열린 국제 정보통신 및 이동통신 전시회에서 애니콜 전화기를 이용해 3G 화상통화를 시연하는 모습. 휴대폰에 달린 카메라는 원래 화상통신을 위해 장착된 부품이기에, 3G 핵심 서비스가 되리라 다들 생각했지만, 한국에선 널리 쓰이지 못했다. 2020년이 되기 전에는. 이종근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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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삼성 휴대폰은 날아올랐다. 엠피스리(MP3)폰, 카메라폰, 가로본능폰, 손목시계폰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진 제품을 선보였고, 이건희폰(SGH-T100)이나 벤츠폰(SGH-E700), 블루블랙폰(SGH-D500)처럼 1000만대 이상 팔리는 기기도 만들어냈다. 2003년에는 영화 <매트릭스2>에 들어가는 매트릭스폰도 만들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E1100처럼 1억5000만대 이상 팔린 휴대전화도 있다. 휴대폰 시장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커졌고, 휴대폰은 패션 아이템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에서, 멋진 디자인과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한국 휴대폰은 정말 잘 팔렸다. 2009년 8월12일 <한겨레> 기사는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전한다.

“휴대전화는 시장 경쟁이 가장 치열한 북미시장에서 압도적 1·2위로 올라섰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에 1170만대를 팔아 4분기 연속 점유율 1위(24.7%) 자리를 지켰다. 2위 엘지(LG)전자(22.6%)의 점유율을 합치면 47.3%에 이른다. 여기에 제조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수출하는 팬택(점유율 3% 안팎)을 더하면, 북미시장에서 팔리는 휴대전화 두대 중 한대가 한국업체 제품인 것이다.”(“전세계 TV·휴대폰 3대 중 1대 ‘한국산’” 2009년 8월12일치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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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을 사용해 영상을 즐기고 있지만, 예전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진 속 기기는 2005년에 출시된 애니콜 위성 디엠비(DMB)폰 SCH-B100. 디엠비는 지상파나 인공위성을 이용해 영상을 수신해 볼 수 있는 서비스다. 디엠비는 무료지만 에스케이텔레콤(SKT)에서 서비스하는 위성 디엠비는 유료 서비스여서, 에스케이텔레콤 이용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류우종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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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많은 문제도 함께 생겼다. 이동통신요금은 예나 지금이나 문제가 되는 사안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납득할 수 없는 해괴한 일도 많았다. 위피(WIPI)라는 모바일 인터넷 플랫폼을 강제해서, 해외 휴대전화나 스마트폰을 도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에스케이텔레콤(SKT)에선 지상파 디엠비(DMB)가 탑재된 휴대폰 출시를 막았다. 무선인터넷 요금을 더 받고 싶어서 와이파이도 탑재하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3.5파이 이어폰 단자도 없어서 전용 이어폰을 꼭 써야 했다. 충전기 모양도 통일되기 전까진 제각각이었고, 휴대폰에 엠피스리(MP3) 파일 듣기 기능을 넣었다고 음반업계에서 반대 집회를 열던 시절이기도 했다. 박승화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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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은 순식간에 일상을 바꿔버렸다. 빨라진 기술 진화는 비슷한 기술을 쓰던 다른 제품을 한데 모으게 만든다. 사진 속에 보이는 2008년의 터치 휴대전화, 전자사전, 캠코더, 피엠피(PMP)는 이제 스마트폰으로 모두 합쳐졌다. 모든 기능을 소프트웨어로 녹여내는 능력은, 컴퓨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윤운식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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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기를 다지는 시간을 거쳐, 국내에서 보호받으며 실력을 갈고닦았다. 외환위기를 맞아 세계에 진출했고, 다양하고 새로운 제품을 제시해 세계 시장 2위까지 올라갔다. 끝내 노키아는 잡을 수 없었지만, 모토롤라 같은 경쟁사는 알아서 망가졌다. 2007년 아이폰이 등장하기 전까진, 모든 게 참 좋았다. 이렇게 끝내면 좋겠지만, 그림자도 짙다.

2005년 8월 <한겨레21>에선 “국내 협력업체들을 쥐어짜라? 수입부품 늘면서 삼성전자 협력업체 줄고 단가 인하 압력으로 마진도 낮아”라는 글을 통해 협력업체 문제를 지적했다.

특허법원에서 휴대전화 관련 중소기업 기술을 빼앗았다는 판정도 받았다.(“삼성전기, 중소기업 기술 뺏었다” 2005년 10월13일치 1면). 출고가보다 높은 판촉비를 지급하며 마케팅을 하기도 했다.(“‘마이너스폰’ 봇물…제조업체 피의 전쟁” 2009년 7월13일치 14면)

이에 대해 2009년 11월23일, 삼성전자 40주년을 축하하는 <한겨레> 칼럼(“삼성전자 40주년에 부쳐” 2009년 11월23일치 30면)은 이렇게 말한다. “21세기 삼성과 삼성전자는… 과연, 세계 일류기업 차원은 물론, 자기가 설정한 ‘경영이념·핵심가치·행동규범’에 일치하는지 냉정히 자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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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해설자인 이요훈 아이티(IT) 칼럼니스트는 아이티산업이 보여주는 ‘와!’ 하는 순간보다 그것이 가져다줄 삶의 변화에 대해 생각합니다. 민예총 정보화팀장과 <넥스아트> 편집장을 지냈으며,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전문위원을 맡은 적 있습니다. 와이티엔(YTN) 사이언스 ‘스마트 라이프’와 아리랑티브이(TV) ‘비즈테크 코리아’(BizTech Korea)에 출연하고 있습니다. ‘자그니 블로그’를 운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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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사진, 기사, 지면 이미지 등의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관련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 사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시즌3인 25~36화는 주로 기업·기업인 이야기로 꾸몄습니다. 주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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