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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美 바이든 행정부 ’카슈끄지 암살 기밀보고서’ 공개 후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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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때와 다르지만 제재에 있어서 ‘인권’ 보다 ‘관계’ 고려해”

세계일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을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사진)가 승인한 것이라고 판단한 기밀 보고서를 공개했다. 카슈끄지 암살 사건에 눈을 감았던 도널드 트럼프 전임 행정부와 달리 사우디 실세 왕세자의 개입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이에 대한 제재에 있어서 미국의 이익만 고려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출범 초기부터 인권을 강조했던 바이든 행정부의 정체성에 타격을 줄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美 정보당국이 판단한 ‘카슈끄지 암살’의 진실...“왕세자가 연루 내지 책임”

미 국가정보국(DNI)은 26일(현지시간) 공개한 4쪽 분량의 기밀해제 보고서에서 카슈끄지 암살을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승인했다고 판단하는 내용을 담았다. DNI는 특히 “우리는 무함마드 왕세자가 카슈끄지를 생포하거나 살해하는 작전을 승인했다고 평가한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사우디 왕실을 비판한 반체제 인사였던 카슈끄지는 2018년 10월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됐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우디의 저명한 가문 출신 언론인인 카슈끄지는 당초 사우디 왕가와 가까웠다가 정부 정책과 무함마드 왕세자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무함마드는 2017년 왕세자로 지명된 이후 사우디 내 비판론을 억압해왔는데, 카슈끄지는 정치적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칼럼을 WP에 쓰기 시작했다. 카슈끄지는 이로 인해 이혼, 사우디에 있는 자녀와의 결별했고 결국 재혼해 터키 이스탄불에 정착하기로 했는데, 국적 증명 서류를 위해 2018년 9월말 이스탄불 사우디영사관을 찾아갔는데, 며칠 후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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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생전 모습.


카슈끄지는 10월 2일 서류를 찾기 위해 영사관을 방문했다가 행방불명이 됐고, 사우디에서 온 암살단에 잔혹하게 살해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사건 이후 사우디가 국제사회의 비난에 직면하자 사우디 법원은 카슈끄지를 죽인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8명에게 징역 7∼20년형을 지난해 9월 확정했다.

유엔 조사단 등은 일찌감치 왕세자가 배후라는 강한 의심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지만, 사우디 정부는 왕세자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DNI는 기밀 보고서에서 무함마드 왕세자가 카슈끄지를 생포하거나 살해하기 위한 작전을 승인했다고 판단했다.

보고서는 그 근거로 2017년 이후 의사결정 과정에 왕세자의 통제권, 핵심 측근과 개인 경호군의 가담, 해외 반체제 인사를 침묵시키기 위해 폭력적 수단 사용에 관한 왕세자의 지지를 꼽았다.

보고서는 “왕세자는 2017년 이후 안보와 정보 기구에 절대적 통제권을 행사했다”며 “사우디 관료들이 왕세자의 승인 없이 이런 성질의 작전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매우 작다”고 적었다. 구체적으로 왕세자는 당시 측근들이 할당된 임무 완수 실패 시 해고나 체포로 귀결될 것을 두려워하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했는데, 이는 그의 동의 없이 민감한 조처를 할 가능성이 작았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사건 당시 이스탄불에 도착한 15명의 팀 중에는 왕세자의 측근 보좌관이 이끄는 조직과 관련된 당국자들이 포함됐는데, 이 측근은 2018년 중반 왕세자의 승인 없이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인물이다. 이 팀에는 왕실경비대에서 왕세자를 경호하는 신속개입군 소속 요원 7명도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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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5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 앞에 살해된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사진과 그를 추모하는 촛불이 놓여 있다. AP=연합뉴스


보고서는 “우리는 신속개입군 요원들이 무함마드의 승인이 없었다면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또 왕세자가 카슈끄지를 사우디에 대한 위협으로 봤으며, 그를 침묵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광범위하게 지지했다고 적었다. 이어 “사우디 당국자들이 카슈끄지를 대상으로 한 불특정 작전을 사전에 계획했다”며도 “언제 그를 해치기로 결정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21명의 명단을 나열한 뒤 이들이 작전에 참여하고 지시를 받았거나, 왕세자를 대신해 카슈끄지의 죽음에 연루 내지 책임이 있다는 고도의 확신이 있다고 밝혔다.

◆美 대규모 제재서 무함마드는 빠져

미 행정부는 보고서 공개와 함께 76명의 사우디 시민권자에게 비자 제한을 가하겠다고 밝혔다. 미 재무부는 사우디 정보국의 전직 부국장인 아흐메드 알아시리를 제재하고, 왕실경비대의 신속개입군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하지만 미국의 제재 대상에 무함마드 왕세자의 이름은 없었다.

국무부는 이와 별도로 연례 인권보고서 프로그램에서 반체제 인사와 언론인을 겨냥한 사우디와 다른 나라에 대한 문서화 작업에 착수했다.

앞서 미 의회는 카슈끄지 보고서 공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트럼프 행정부 당시 DNI 측은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원 안전과 활동을 약화할 수 있다”고 거부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카슈끄지 암살 사건의 실체를 외면하고 무함마드 왕세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카슈끄지 암살 사건과 관련해 트럼프 때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사우디와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제재 등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를 의식한 듯 보고서 공개 전날 왕세자의 부친이자 통치자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통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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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밀워키=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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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버그통신은 “무함마드 왕세자를 제재할 것이라는 징후는 아직 없다”고 전했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결국 사우디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인권보다는 결국 사우디와의 관계를 우선시했다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딜레마...“결국 ‘인권’보다 ‘관계’ 중시”

바이든 행정부가 공개한 보고서의 핵심은 무함마드 왕세자가 카슈끄지 생포와 살해를 승인했다고 볼만한 여러 정황들이다. 하지만 카슈끄지 암살 사건의 핵심인 무함마드 왕세자를 제재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결국 인권보다 관계를 택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후보시절에 “카슈끄지 암살은 왕세자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믿는다”며 “그들이 대가를 치르고 ‘버림받은 사람’이 되도록 하겠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하지만 백악관 주인이 된 뒤에는 미국산 무기 최대 구매국이자 대이란 대응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인 사우디와의 관계를 우선 고려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선 후보 시절의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물론 무함마드 왕세자가 수년 뒤 사우디를 다스리게될 것이라는 점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조처를 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과 적대적이거나 껄끄러운 나라들이 많은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대표적인 동맹국인 사우디와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를 재설정하겠다고 밝힌만큼 이번 보고서 공개 이후의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관측도 있다.

WP는 27일 “바이든 행정부의 보고서 공개는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를 더욱 긴장시킬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왕세자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는 아직 밝히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앞서 이번 보고서를 공개한 DNI의 애브릴 헤인스 국장은 “이번 보고서가 양국관계의 진전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를 제재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인권을 우선으로 한 바이든 행정부의 정체성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카슈끄지가 설립한 미국의 인권단체 ‘아랍 세계를 위한 민주주의’(DAWN)는 “바이든 행정부의 투명성에 감사한다”면서도 “책임자인 사우디 왕세자에 대해 제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아녜스 칼라마르 유엔 즉결 처형에 관한 보고관은 “미국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개인 자산은 물론, 그의 국제 업무에 대해서도 제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싱턴=정재영 특파원 sisley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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