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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그날의 치킨은 형제에게 매우 따뜻한 음식이었으리라 [김기자와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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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 서울 마포구의 한 치킨집에서 있었던 어떤 겨울 이야기

세계일보

A(18)군이 한 치킨 프랜차이즈 본사에 보낸 자필편지 일부. 이 편지는 지난 16일 도착했다. 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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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년 전쯤의 어느 날.

치킨이 먹고 싶다며 울며 보채는 일곱 살 어린 동생을 달래기 위해 무작정 데리고 거리에 나오기는 했지만, A(17)군이 손에 쥔 돈은 5000원이 전부였다.

동네 이리저리 치킨집을 돌며 조금이라도 좋으니 5000원어치만 먹을 수 있느냐고 물은 이들을 환영한 곳은 없었다.

어릴 적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와 살아온 형제. 짬짬이 돈가스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A군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가게 형편이 어려워지자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된 후, 이따금 다른 아르바이트를 이어가며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다.

마침내 다다른 서울 마포구의 한 치킨집 앞. 하지만 여태 거절만 당했던 터라, A군은 쉽게 용기를 내지 못했다.

치킨집을 운영하는 박재휘(31)씨는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A군 형제를 보고는, 일단 이들을 가게에 들어오게 했다.

형제의 사정을 들은 박씨는 메뉴 하나를 이들에게 내어줬고, 딱 봐도 양이 너무 많아 ‘잘못 주신 것 같아요’라는 A군의 말에도 그는 “식으면 맛이 없다”며 콜라 두 병을 더 내어왔다.

A군은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치킨을 앞에 두고도 돈 걱정에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옆에서 행복해하며 맛있게 치킨 먹는 동생을 보니 그런 걱정은 순간 새카맣게 잊어버렸다.

하지만 계산을 할 때가 다가오자 돈을 낼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다시 일었고, 몰래 동생 손을 잡고 도망갈까 생각까지 했던 A군은 오히려 사탕을 한 개씩 주며 나중에 와서 계산하라는 박씨의 말을 들었다.

그래도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 5000원이라도 내겠다고 A군이 버텼지만, 박씨는 이들 형제에게 결국 돈을 받지 않았다.

지난 16일, 이러한 내용이 담긴 A4용지 두 장 분량의 자필편지가 한 치킨 프랜차이즈 본사에 도착했다.

꼬불꼬불 글씨로 가득 찬 편지에서 A군은 “얼마 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는지 1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고 떠올렸다.

추운 날 치킨을 먹고 싶어 하는 동생을 데리고 거리를 떠돌던 중, 자신들을 들어오게 해준 치킨집에서 평생 잊지 못할 친절을 얻은 감동이 소년의 가슴에 진하게 자리 잡은 것이었다.

사실 A군의 동생은 형 몰래 박씨의 가게에 또 다녀왔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동생에게 ‘치킨을 또 먹고 왔다’는 말을 들은 A군은 ‘그러지 말라’고 동생을 따끔하게 혼냈다.

누군가의 가슴에서 우러나온 친절을 당연히 여기지 말라는 형의 가르침이었다.

또 어느 날은 덥수룩했던 동생의 머리가 깔끔해진 것을 보고 ‘복지사님이 다녀가셨냐’고 물었다가 ‘치킨집에 갔더니 사장님께서 미용실에 데려가 깎아줬다’는 동생의 말을 듣고는, 죄송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한 마음에 더욱 가게 근처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됐다.

그러던 중, A군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들의 사연을 뉴스 등에서 접한 뒤, 문득 박씨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무리 웃으며 친절을 베풀었다 한들 박씨도 엄연한 자영업자기에 코로나19로 심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는지 소년은 걱정도 됐다.

편지에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고마움과 이러한 걱정 등이 진하게 묻어나 있었다.

A군은 편지 말미에 “막상 볼펜을 잡으니 말이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것 같고, 이런 글도 처음 써봐서 이상한 것 같다”면서도 “제가 느꼈던 감사한 감정이 편지에 잘 표현되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편지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글로 마무리된다.

“처음 보는 저희 형제에게 따뜻한 치킨과 관심을 주신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앞으로 성인이 되고 돈을 꼭 많이 벌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 수 있는, 사장님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A군의 편지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 됐다.

사연을 접하고 매장의 위치와 전화번호까지 알아낸 일부 누리꾼은 형제에게 친절 베푼 박씨를 ‘돈으로 혼쭐내겠다’며 치킨을 주문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자고 나니’ 갑자기 몰려든 관심과 예기치 못했던 주문 쇄도에 박씨는 배달 애플리케이션의 리뷰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계속 울리는 전화벨에 눈을 뜨게 되었고, 지금 이 시간까지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를 ‘돈쭐’ 내주시겠다며 폭발적으로 밀려들어오는 주문과 매장에 찾아주시는 많은 분들의 따뜻한 발걸음, 주문하는 척 들어오셔서 선물을 주고 가시는 분들. 심지어 좋은 일에 써 달라며 봉투를 놓고 가신 분도 계십니다. … (중략) …

전국 각지에서 응원전화와 메시지, 댓글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중략) …

제가 특별한 일,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하셨을 거라 굳게 믿기에 많은 분들의 관심과 사랑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렇게 박수쳐주시고 칭찬해주시니 그 소중한 마음 감사히 받아 제 가슴속에 평생 새겨두고, 항상 따뜻한 사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세계일보

서울 마포구에서 치킨집을 운영 중인 박재휘(31)씨가 지난 26일, 한 배달 애플리케이션의 리뷰 페이지에 올린 감사의 글 일부. 애플리케이션 캡처


한편, 해당 프랜차이즈 본사에 따르면 박씨는 A군 형제를 그 후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본사에 도착한 편지봉투 겉면에도 받는 사람은 있지만 ‘보내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은 적히지 않았다.

본사 관계자는 지난 26일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형제를 찾으려 우체국을 통해 방법을 알아봤지만 만날 수 없었다”며 “보내는 사람의 주소가 없어도 편지는 보낼 수 있다는 설명만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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