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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헤엄귀순'에 뚫린 철책 배수로, 軍은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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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카메라·배수로·CCTV…경계망 3번 무너져

상륙 직후 카메라에 포착…"감시병, 알림창 꺼"

"평소 해안 순찰했더라면 배수로 쉽게 확인"

초동대처도 실수…서욱 "출퇴근 간부로 오인"


군 당국이 '헤엄 귀순' 경계 실패를 자인하는 자체 조사 결과를 내놨다. 23일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군의 감시장비에는 북한 남성이 총 10차례 포착됐지만 8차례는 놓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상륙한 직후 감시카메라에 5차례 포착돼 2차례 알림 경고가 떴는데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또 군은 북한 남성의 이동경로인 해안철책 아래 배수로 존재를 이번에야 파악했다. 군 검열단이 사건이 발생한 지난 16일부터 4일간 현장 조사로 확인한 내용들이다.

합참에 따르면 북한 남성은 16일 새벽 1시 5분쯤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 인근 해안(육군 22사단 경계 지역)으로 상륙했다. 군은 이 남성이 잠수복을 입고 6시간가량 헤엄쳐 월남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몰 직후인 15일 오후 7시쯤 북한 강원도 지역에서 출발한 셈이다.

북한 남성은 잠수복과 오리발을 상륙 지점에서 멀지 않은 바위 사이에 벗어놓은 뒤 남쪽을 향해 400m 정도 걸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군의 근거리 감시카메라 4대에 남성의 움직임이 5차례나 포착됐다. 이 중 두 번은 경고음까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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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엄귀순’ 당시 상황.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합참 관계자는 "수상한 움직임이 나타나면 감시 모니터에 팝업 형태로 알림창이 뜨면서 경고음이 울린다"며 "당시 다른 작업 중이던 영상감시병이 오(誤)경보로 생각해 확인도 안 하고 알림창도 두 번 다 꺼버렸다"고 밝혔다. 또 이런 상황을 감독해야 할 장교가 바로 뒤에 있었는데도 부대와 전화통화를 하느라 놓친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관련, 이날 이채익 국민의당 의원은 "군 조사 결과, 사건 당일 바람이 크게 불어 경계시스템 경보가 1분당 3회나 작동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지적했다.

군의 1차 경계망을 뚫은 북한 남성은 이후 해안 철책 아래 배수로를 발견했다. 직경 90㎝, 길이 26m의 배수로 입구에는 녹슨 차단막이 훼손된 채 방치돼 있었다. 결국 남성은 손쉽게 배수로를 기어서 통과해 민간인통제선(민통선)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2차 경계망이 뚫린 것과 관련해 군 당국은 관리 소홀을 인정했다. 지난해 7월 탈북민의 강화도 월북 사건 이후 전군이 배수로 일제 점검을 했지만, 해당 배수로는 관리 목록에 없었기 때문이다. 합참 관계자는 "현장 조사 과정에서 그동안 관리하지 않았던 배수로 3개를 추가로 발견했다"며 "(북한 남성이 이용한 배수로는) 통과하기 이전에 이미 훼손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당 지역에는 높은 방벽이 있고 배수로가 돌출돼 있지 않아서 미처 확인을 못한 것 같다"며 "해안 쪽에는 미확인 지뢰가 있어 수색정찰도 하지 않는 곳"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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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28일 탈북민 김모씨(24)의 월북 경로로 추정되는 강화군 월곶리 인근의 한 배수로의 내부 모습. 군 당국은 김씨가 배수로 내 쇠창살 형태의 철근 구조물과 철조망을 뚫고 헤엄쳐 월북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 사건 이후 군 당국은 전국의 배수로를 전면 재점검하겠다고 약속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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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해당 지역을 잘 아는 전직 군 관계자는 "그곳에 미확인 지뢰 지역은 없다. 평소 해안을 열심히 순찰했더라면 배수로를 쉽게 찾았을 것"이라면서 "과학화 경계 시스템만 믿고 근무를 태만히 했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북한 남성이 군의 감시장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배수로를 통과한 지 2시간 20여분 뒤인 오전 4시 12분쯤이다. 배수로에서 5km 남쪽의 해군 합동작전지원소 울타리에 설치된 CCTV에 남성이 1분 간격으로 3차례 포착됐다. 하지만 알람은 울리지 않았고 위병소 근무자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세 차례 경계망을 허문 남성은 4시 16분쯤 제진검문소 CCTV에 다시 2차례 포착된다. 그제야 검문소 근무병이 "신원 미상자를 발견했다"고 상황을 보고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합참 관계자는 "해당 민통 소초에서 자체적으로 초동 조치에 나섰지만 신원 확보에 실패했다"며 "30여분 뒤 사단장에게 보고한 뒤 수색·경계 단계를 격상하고, 6시 35분쯤 '경계태세 1급'(대침투 경계령인 '진돗개 하나')을 발령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서욱 국방장관은 23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민통선에서 사람이 발견됐는데도 출퇴근 하는 간부 정도로 보고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 같다"고 경계 실패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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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욱 국방부 장관이 23일 국회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군 관계자와 대화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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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북한 남성은 7시 27분쯤 검문소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야산에서 발견됐다. 최초 군의 감시카메라에 포착된 지 6시간 22 분만의 일이다.

군 당국은 현장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도 경계 실패에 대한 구체적인 후속 조치는 밝히지 않았다. 합참은 "22사단의 임무수행 실태를 진단해 후속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환골탈태 각오로 강도 높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 22사단장은 보직 해임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군 관계자는 "이중삼중으로 막아야 할 경계망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확인됐는데도 군은 경계 실패 때마다 나오는 해명만 되풀이할 뿐"이라며 "아마 다음에 뚫려도 같은 대답을 할지 모르겠다"고 씁쓸해했다.

이철재·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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