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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부 나라냐" 여권이 때리자, 홍남기는 백기 들었다

글자크기

당·청, 선거 앞두고 재정 지원책

기재부, 브레이크 역할 제대로 못해

코로나 자영업자 지원 필요하지만

“포퓰리즘 휘둘리면 경제위기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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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정세균 국무총리(오른쪽)에게 인사하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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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 20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이 나라가 기획재정부의 나라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김용범 기재부 1차관이 “(자영업 손실보상제를) 법제화한 나라를 찾기 어렵다”며 우회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힌 데 대해서다. 23일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재정 건전성을 외치면서 무조건 적게 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라며 기재부를 저격했다. 결국 자영업 손실보상제도는 여당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

청와대ㆍ여당의 ‘기재부 때리기’가 일상화하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경제 위기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경제 컨트롤타워가 실종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 기재부의 나라 살림 걱정은 정부조직법에 명시한 본연의 역할이다.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만큼 기재부는 해외 현황과 우리의 재정 형편을 고려해 신중한 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여권에선 “개혁 저항 세력”(정 총리) 같은 질타와 비난이 쏟아진다. 전문가의 경험과 식견을 무시하기 일쑤다. 이를 두고 "구박"(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이런 현상은 문재인 정권에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이나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과정 등에서 ‘청와대ㆍ당 차원 대책 거론→기재부 반발(혹은 소극적 추진)→청와대ㆍ당의 비판→그대로 추진’으로 계속 되풀이됐다. 지난해 총선에서 180석 규모 거대 여당이 탄생하자 ‘기울어진 운동장’은 더욱 가팔라졌다. 국민에게 걷은 세금으로 조성한 예산을 경제 발전이나 국가 미래를 위해 쓰기보다 집권 여당의 득표 논리에 따른 선거 전략에 악용할 가능성이 우려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치권이 주도권을 잡고 어젠다를 밀어붙이더라도 경제 관료가 전문가로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문제점을 보완하며 ‘정반합(正反合)’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실종됐다”며 “경제부처가 4월 재ㆍ보궐선거, 내년 대선을 앞둔 거대 여당의 ‘포퓰리즘’ 정책에 휘둘리면 경제 위기가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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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아래)이 지난 1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회의에서 정세균 총리의 모두 발언을 듣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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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처 '소신 실종'



편 가르기식 부동산 정책, 무차별적인 ‘재정 살포’ 등 포퓰리즘으로 비판받는 정책에 제동을 거는 관료가 사라지면서 경제부처의 존재감도 사라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경제부총리는 “현 정부는 정책 방향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관료에게 유독 가혹하다”면서 “경제부처가 이견을 내지 않는 것은 이런 학습효과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경제부처 관료의 소신 실종이다. 지난해 재난지원금 지급 논란, 추경 편성 등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처음에 반대하다 소신을 접곤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홍백기’(白旗, 항복의 의미), ‘홍두사미’(용두사미를 빗댄 말)라는 별명까지 붙여졌다. 최근엔 3월 공매도 재개를 두고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당의 반발에 입장을 바꿨다. 반대조차 하지 않았던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은 탈원전 정책 추진 과정에서 감사원 감사에 앞서 관련 자료를 삭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여당 독주에 위축한 측면도 있다. 기재부 한 과장급 간부는 “여론을 등에 업은 정책을 만들고 싶어하는 국회에 수시로 불려간다”며 “좋은 정책은 당에서 생색내고, 비판받는 정책에 대한 책임은 부처에 지우니 힘이 빠진다”고 털어놨다. 산업통상자원부 한 국장급 간부는 “힘든 업무 강도는 버틸 수 있지만, 청와대, 정치권의 압박에 자괴감이 들 때가 많다”며 “시행착오를 줄이는 측면에서 관료보다 정치인 출신 장관이 낫다는 기류가 강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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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세종청사로 출근하는 공무원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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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과학협의회는 최근 감사연구원 의뢰로 제출한 ‘적극 행정을 위한 법체계와 감사원의 역할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정치가 (행정을) 주도하는 현실에서 ‘다음 정부에서 어떻게 뒤바뀔지 모른다’는 불신 때문에 적극 행정을 펼치기 쉽지 않다”며 “과거보다 엄격해진 법치주의 원리에 부응하면서 정치적 상관의 적극 행정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상충적인 업무환경에 처해있다”고 진단했다.



전직 부총리 "모든 플레이어 설득해야"



전직 고위 경제관료들은 달라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는 “과거보다 고단하겠지만 이미 정부의 역할이 바뀌었다”며 “청와대ㆍ국회뿐 아니라 국민까지 모든 플레이어를 설득한다는 생각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재부 출신으로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지낸 현정택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 맞선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의 소신만큼이나 경제도 전문 영역”이라며 “‘테크노크라트(과학, 전문 기술을 갖춘 관료)’로서 소신을 관철할 수 없다면 차라리 물러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산업부 장관은 “과거 후배 공무원으로부터 존경받은 명(名)재상은 정치권력에 대해 할 말을 하는 용기와 미래 비전, 다른 부처 장관을 아우르는 리더십을 동시에 갖췄다”고 말했다. 실제 역대 명재상으로 꼽히는 경제부총리에겐 인재를 알아준 대통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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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윤증현 경제부총리(오른쪽)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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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당시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이었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시중 은행 살생부를 들고 가자 “평가를 공정하게 했다면 원칙대로 하라”고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면전에서 “대통령이라고 다 아는 것은 아니잖습니까”라며 주장을 굽히지 않은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을 받아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었다.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는 “대통령은 최종 결정하는 자리고 경제를 다루는 건 전문가여야 한다”며 “대통령이 경제부총리를 여러 장관 중 하나로 여기지 말고 자주 독대해 신속히 교통정리 하고, 신뢰한다는 메시지도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김기환ㆍ임성빈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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