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낙태한 여성이 모두 감옥에 간다면? '낙태죄' 모순 꼬집는 만화 '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수신지 작가의 만화 <곤>의 한 장면. /귤프레스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처벌하는 현행법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낙태죄가 생긴 1953년 이후 한 번이라도 낙태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처벌받게 됩니다.”

인공 임신중단(낙태)을 한 여성을 모조리 찾아내 처벌하는 세상, 물론 현실의 이야기는 아니다. 2019년 4월 헌재는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269조1항 등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21년 1월1일 0시를 기해 ‘낙태죄’는 사라졌다. 처벌의 시대는 끝났지만,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한 의료 시스템 등 남은 과제는 많다. ‘낙태죄 합헌’ 이후 가상의 대한민국을 그린 수신지 작가의 만화 <곤>은 법적 단죄가 사라졌다 해도 남은 사회적 이중잣대를 비춘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웹드라마로 제작돼 방영중인 전작 <며느라기>로 여성 독자들의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킨 작가의 다음 선택은 임신중단 문제였다. 지난 13일 전화로 만난 수신지 작가는 “<며느라기>에 임신과 출산, 육아 문제가 빠져 있었다면 낙태죄에 대한 이야기로 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그런 면에서 <곤>은 <며느라기>의 후속”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헌재 결정이 나오고 한 달여 뒤 온라인에서 먼저 연재를 시작한 <곤>은 최근 2권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며 완간됐다. <며느라기>가 주인공 ‘민사린’이 결혼 후 겪는 일상 속 가부장제의 모순을 현실적으로 그렸다면, <곤>은 임신중단을 둘러싼 사회의 이중적 태도를 생생하게 비춘다. 헌재 결정과 맞물려 임신중단을 둘러싼 논의가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올 무렵, 작가가 펼쳐보인 상상의 세계는 이렇다. 출산율이 계속 떨어지고 낙태죄 합헌 결정이 나오자 정부는 사문화됐던 법을 적극 적용해 ‘여성과 의료진만’ 처벌하기로 한다. 인공 임신중단 여부를 색출하기 위해 IAT라는 검사를 개발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전수조사가 시작된다. 한 번이라도 인공 임신중단을 한 여성은 감옥에 가야 한다. 그렇게 작가는 국가에 의해 여성들이 ‘사라지는(gone)’ 세상을 그린다.

이내 전국의 교도소는 포화상태가 되고, 과거 산아제한 정책 일환으로 국가가 낙태 시술을 장려했던 시기 임신을 중단한 중년 여성들이 줄줄이 양성 판정을 받아 ‘육아 공백’ 사태가 벌어진다. 작가는 “상황에 따라 ‘죄’가 되기도, 아니기도 했던 게 낙태죄”라고 말했다.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는 쪽에선 젊은 여성이 책임감 없이 낙태를 할 것이란 선입견이 있지만, 과거엔 산아제한 정책 아래 ‘낙태 버스’가 운영되기도 했고, 아들을 낳기 위해 낙태를 선택하는 일도 많았어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낙태에 대한 이런 이중잣대, 법적 모순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작품 속 워킹맘인 첫째딸 노민형은 아이를 돌봐주는 친정엄마가 곧 수감된다는 소식에 아이 맡길 곳부터 걱정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둘째 민아는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자신의 성(姓)을 물려주기로 남편과 합의했지만 계획에 없던 임신에 혼란스럽다. 셋째 아들 민태와 그의 여자친구 샛별은 갑작스런 임신으로 수백만원대의 ‘불법 시술’을 알아보며 전전긍긍한다. 이들 남매의 엄마 현숙은 과거 아들을 낳기 위해 보건소에서 임신중단 시술을 받았다. IAT 양성 판정을 받은 현숙은 “옛날에는 그게 흔한 일이었어. 흉도 아니었다니까”라며 애써 담담한 모습을 보이지만 갑자기 ‘죄인’이 되어버린 것이 당혹스럽다. “생각해보니 희한하네. 벌은 여자가 받고, 성(姓)은 남자가 받고?”

경향신문

귤프레스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경향신문

귤프레스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작가는 이렇듯 남성은 예외로 둔 채 여성에게만 임신중단 책임을 묻는 불합리와 결혼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적 시선을 각 인물이 처한 상황을 통해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작품 속 샛별의 말처럼, “왜 어떤 임신중지는 죄가 맞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울러 임신중단엔 독박 육아와 경력단절, 남아선호 등 해묵은 젠더 이슈들이 연결돼 있음을 드러낸다. 작가는 “여성이 사라진 세상에서 돌봄 노동 등 그간 여성들이 해왔던 많은 노동의 자리가 드러난다고 생각했다”며 “여전히 아이를 돌보고 가정을 지키라는 이유로 세상이 여성들에게 사회에서 사라지라고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은데, 그런 맥락에서 제목을 ‘곤(GONE)’이라고 붙였다”고 말했다.

완결편인 2권 제목도 ‘곤’이지만, 1권과 다른 의미의 부제 ‘GO ON’이 붙었다. IAT 검사 오류가 드러나고, 낙태죄 헌법불합치 선고가 내려진다.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삶을 꾸려간다. 그렇게 사라졌던(gone) 여성들, 그들의 목소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나아간다(go on). 그런 면에서 책의 결말은 낙태죄가 사라진 2021년, 지금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연재를 구상할 때부터 마지막 장면은 앵커가 된 샛별이 낙태죄 폐지 소식을 전하는 것이 됐으면 했는데, ‘함께 끝까지 지켜봅시다’라는 뉴스 멘트처럼 (입법 논의를)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아직 남은 과제는 많지만, 낙태죄가 폐지되기까지 많은 여성들이 노력해 왔는데 낙태죄 없는 세상을 함께 뿌듯해하고 축하했으면 좋겠습니다. 임신중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는데는 아직 시간이 더 걸리겠죠. 그 오래된 마음들을 바꾸는데 이 만화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 [인터랙티브] 그 법들은 어떻게 문턱을 넘지 못했나
▶ 경향신문 바로가기
▶ 경향신문 구독신청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