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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의 입] 문 대통령의 세 가지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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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꿈을 먹고 살아 간다. 대통령에게도 이상향은 있을 것이다. 꿈이 있어야 희망도 있다. 대통령의 가장 큰 임무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꿈과 이상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 뿌리를 잃어버린 꿈과 이상을 우리는 환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환상이 지나치면 망상이 된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대략 세 가지 환상이 있다. 첫 번째 환상은 북한에 대한 ‘비핵화 환상’이다. ‘대북 환상’이라고 불러도 좋다. 두 번째 환상은 ‘탈(脫)원전 환상’이다. ‘판도라’라고 하는 원전 사고 재난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더욱 굳어졌다는 환상이다. 세 번째 환상은 ‘소주성 환상’이다. 즉 소득주도성장 환상이다. 말이 마차를 끄는 게 아니라 마차가 말을 끌 수도 있다는 환상이다.

문 대통령에게는 ‘퇴임 후 환상’도 있는 것 같다. 퇴임 후에는 과거 어떤 대통령도 누리지 못했던 존경 받는 전임 대통령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전직 대통령들이 줄줄이 퇴임 후의 참화를 면치 못했던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자신만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어떤 수사 대상이나 기소 대상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편안한 대통령, 잊혀진 대통령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 같은 것이다.

문 대통령이 갖고 있는 가장 좋지 않은 환상이 바로 ‘대북 환상’이다. 북한 김정은은 지난 8일 노동당 당 대회에서 핵만 36번을 언급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지난 11일 신년사에서 “나는 거듭 만나고 끊임없이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일주일 뒤 기자회견에서 오는 3월 연례 한미군사훈련 재개 문제와 관련해 “필요하면 남북군사위원회를 통해 북한과 협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국민들은 기가 차고 어리둥절할 뿐이다.

어제 한국 국방부는 문 대통령의 말을 이어받은 듯 한미 연합훈련도 “남북 군사공동위에서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훈련을 바로 그 적과 협의한다고 공언을 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했다. 취임사의 핵심 개념은 민주주의·동맹·통합 등 세 가지였다. 앞선 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웠고 동맹을 거래 개념으로 접근했다면, 바이든 정부는 가치와 원칙을 중시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외교 안보에서 동맹, 가치, 원칙, 전문가, 실무 등으로 전환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아직도 의리, 측근, 즉흥적 이벤트를 고집하면서 환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 후보자는 엊그제 청문회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해 “모든 것이 더 나빠졌다”고 했다. 대북 정책의 전면적인 재검토 방침을 함께 피력했다.

아무리 눈에 콩깍지가 씌워서 눈이 먼 짝사랑에 빠져 있다가도 3년쯤 시간이 지나면 그 환상에서 벗어나는 법이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콩깍지 유효기간은 3년인 것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집권 4년이 끝나가는 데도 북한을 향해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다. 문 대통령의 대북 환상에는 도대체 유효기간이 없는 것 같다.

문 대통령은 이번 주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을 외교 장관에 기용했다. 미국 외교와 국제 정세의 변화된 요인을 무시하고 기존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정의용 전 실장은 미국 외교가와 군사 전문가들에게 거짓말쟁이로 찍혀 있다는 보도가 여러 차례 나왔다. 정의용 전 실장이 2018년3월 백악관에 전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거짓으로 판명됐다. 2019년11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기술적으로 이동식 발사대(TEL)에서 발사하기 어렵다”는 정 실장의 발언에 대해 미국의 군사 전문가들은 ‘입이 떡 벌어지는 거짓말(jaw droppingly false)’ ‘완벽한 헛소리(absolute bullshit)’라고 했다. 제프리 루이스 미들버리 국제학연구소 동아시아 비확산 프로그램 소장, 안킷 판다 미국과학자연맹 선임연구원 등이 내놓은 논평이다.

두 번째 환상, 즉 문 대통령은 ‘탈원전 환상’에서도 당분간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 진보주의 이상가(理想家), 인권주의 변호사, 이런 이력을 가졌다면 응당 친환경 대통령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자기 환상 같은 것이 있었다고 진단할 수밖에 없다. 친환경을 하려면 원전을 폐지해야 하고 태양광으로 가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이 굳어진 것 같은데, 원전이야말로 친환경 에너지이고, 탈원전 과정에서 경제성 조작, 상위 정책 무시 같은 숱한 위법적 행동이 저질러졌고, 태양광의 폐해가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도무지 그 환상에서 깨어날 기미가 없다. 정권 교체 후에 후임 대통령이 다시 제자리로 갖다 놓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세 번째 환상, 즉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효과를 내고 있다는 환상에서도 도대체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소득도 경제와 기업의 성장에서 나오는 것이지, 소득이란 것이 무한정 세금과 재정에서 충당될 수는 없다는 간단한 이치를 계속 부인하고 있다. 이 환상도 정권이 교체되기 전에는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니면 오는 4월에 있을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소규모 정권교체’가 일어난다면, 그것도 압도적인 표 차이로 그런 충격이 가해진다면 약간의 변화 가능성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번 주 이런 일이 있었다. 지난 화요일 19일 있었던 일이다. 그날은 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러자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과 집권당 대표가 결과적으로 국민 여론을 슬쩍 떠보고 서둘러 바람을 빼버린 것이다.” “현직 대통령은 시간이 지나면 전직 대통령이 된다. 전직 대통령이 되면 본인이 사면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청와대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면서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튿날 발끈한 민주당의 김경협 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공업용 미싱을 선물로 보낸다.”

여기에 대해 길게 논평할 생각은 없다. 다만 문재인 정권 사람들은 정권 교체 후에도 일종의 안전장치가 마련돼 있다는 환상을 가질지 모른다는 점은 지적해야 한다. 그들은 두 가지 안전판이 있다고 볼 것이다. 하나는 공수처 출범이다. 문 대통령이 어제 임명장을 준 임기 3년의 공수처장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이 야당이 되어도 공수처가 바람막이가 될 것이란 환상이다. 둘째로는 설령 국민의힘 쪽으로 대통령이 바뀌어도 민주당이 수퍼 야당으로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은 여전할 것이란 점이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나중에 자신의 발언을 약간 부드럽게 다듬기는 했다. 문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정치 보복을 다짐했던 발언이라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지사지를 해서 사면 문제를 봐달라는 간곡한 부탁의 말이었다”고 했다. 결과는 시간이 흘러보면 알 것이다. 다만, 권력을 쥐고 있는 현직 공직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참으로,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신임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이 된다는 간단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권력이란 그렇게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환상에 빠져들게 하는 것 같다. 1년 전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면 그냥 잊혀진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부디 그렇게 되길 바란다. 다만 결과는 두고 보면 알 일이다./

[김광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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