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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진통제 1㎎이 너무나 무거웠다" 투병하던 최정례 시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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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로 썼던 고(故) 최정례 시인이 2014년 본지와 인터뷰를 하던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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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례 시인이 16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66세. 일상을 소재로 한 산문시의 세계를 보여줬던 최시인은 2015년 미당문학상을 비롯해 현대문학상(2007년), 백석문학상(2012년), 오장환문학상(2015년)을 받았다.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개천은 용의 홈타운’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비틀고 에둘러 정곡을 찌르는, 고인의 특기가 드러난 작품이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개천은 용의 홈타운’중) 최시인의 산문시에 대해 당시 심사위원 권혁웅ㆍ고형렬ㆍ김기택ㆍ이시영ㆍ황현산은 “한 이야기가 자유로운 연상을 타고 다른 이야기로 건너가고, 한 이미지가 변신담의 주인공처럼 모습을 바꾸면서 다른 이미지가 된다”며 “한 번에 여러 개의 삶을 사는 일이자 여러 개의 현재가 이곳에서 웅성거리고 있음을 증언하는 일”이라고 평했다.

최시인은 ‘행갈이와 운율이 없는 시’라는 형식적 규범에 갇혔던 산문시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변변하지 못한 삶을 버무려놓은 작품은 강렬했다. “저지방 우유, 고등어, 고무장갑…, 자질구레한 쇼핑 물품을 차 트렁크에 싣는데 외국 사는 친구가 국제전화로 한가한 소리를 늘어 놓는다. 방심한 사이 웬 사내가 내 차를 들이받고, 친구는 전화를 끊지 않는다.”(‘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중) 최시인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일상성은 힘이 세다”며 구체적 시어를 쓰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고인은 경기도 화성 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내 귓속의 당대나무 숲』『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등의 시집을 냈다. 지난해 여름에 고열로 병원을 찾았다가 면역결핍질환의 일종인 ‘혈구 탐식성 림프조직구증식증’ 판정을 받고 항암제 등 치료를 시작했다. 투병 중에도 작품들을 묶어 지난해 11월 『빛그물』(창비)를 마지막 시집으로 펴냈다.

등단 30주년 기념이기도 했던 이 7번째 시집에 대해 고인은 “이곳을 말하면서 동시에 저곳을 말하는 알레고리의 시들을 포함했다”고 했고, 시집 속엔 투병 기록 또한 남겼다. "1㎎의 진통제를 맞고/잠이 들었다/설산을 헤매었다(중략)/1㎎이 너무나 무거웠다/1㎎을 안고/빙벽을 오르기가 힘들었다/그 1㎎마저 버리고 싶었다"(‘1㎎의 진통제’ 중) . 추천사에서 문학평론가 김인환은 “이 시집에서 우리는 어떠한 위기와 시련에도 손상되지 않는 인간의 신비를 읽을 수 있다”고 했으며 신형철 평론가는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새로움도 펼쳐내는 방식으로 나이들어가는 것이 모든 예술가의 꿈일 것이다. 최정례는 그 꿈을 이루었다”고 썼다.

유작이 된『빛그물』 편집자와 대화에서 고인은 “병원 들락거린 지 6개월이 됐는데 그동안 전혀 몰랐던 사람들과 다양하게 만나게 되고 그들이 다 자기 생명의 벼랑에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배울 것이 많다”고 했다. 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질문에는 “시를 통해서건 그 무엇을 통해서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라고 답했다. 고인은 투병 중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발인은 18일 오전 6시20분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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