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 뒤로 어릴 때 부친 김관주 목사와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이 보인다. 왼쪽 사진은 한경직 목사와 찍었다. “고교 졸업 무렵 한경직 목사를 찾아 좋은 목사가 되려면 어느 대학을 가야 하느냐고 묻자 역사를 공부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서울대 사학과를 갔죠.” 강성만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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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다윗)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사도 바울) “나는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한경직)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인 김명혁(84) 강변교회 원로목사가 늘 지니고 다니는 종이쪽지에 적힌 글귀다. 그가 기독교인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바로 죄인 의식이다. “요즘 (기독교인들은) 나만 옳고 다 틀렸다고 해요. 의인 의식이죠. 하지만 성경(마태복음 9장 13절)을 보면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해요. 자기 잘났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어요. 다 못난 이들인데 나 잘났다고 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향해서도 죄인 의식을 가져야 해요. 이게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는 2008년에 강변교회 담임목사를 내려놓고 지금껏 13년 동안 주말마다 작은 교회를 돌며 설교를 해왔다. 여든을 훌쩍 넘겼지만 지금도 직접 승용차를 몰고 전국의 작은 교회를 찾는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이미 4월 초까지 확정된 설교 일정이 게시돼 있다. 경북 영천, 충북 보은 등 비수도권 교회가 다섯이나 된다.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수서역 근처 사무실에서 만난 김 목사에게 “장거리 운전이 힘들지 않으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얼마 전부터 강변교회에서 지방 갈 때는 쏘나타 차량을 내줘 내가 몰고 가요. 내 차인 아반떼는 주행 거리가 44만㎞나 됩니다. 요즘은 가까운 거리는 이 차로 다니죠.”
지난 초여름부터 그의 승용차가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그가 작년 6월부터 매주 첫 번째 토요일에 강남 지역 판자촌인 구룡마을을 찾아 40가구에 빵과 현금 3만원씩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 몇 번 갔던 구룡마을이 문득 생각 나서 찾았죠. 마을 통장을 오래 하신 분의 안내로 가정을 방문하는데 주민들이 반가워하고 좋아해요. 전체 주민이 200여 분인데 신자는 거의 없어요.”
김 목사가 돕고 있는 중국 조선족 동포들이 연말에 보내온 감사 편지. |
그는 지난 20년 동안 중국의 조선족이나 탈북자 가정의 불우한 아이들을 돕는 데도 힘써왔다. 매년 평균 150명에게 월 5만원씩 후원금을 보냈다. 지금껏 3100여명이 도움을 받았단다. 이 후원 활동에는 강변교회를 포함해 교회 37곳이 참여하고 있다. 그는 지난 연말에도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편지를 많이 보내왔다면서 기쁨이 가득한 표정으로 직접 편지를 읽어 보였다. 이 중에는 ‘후원받은 아이들이 커서 법관이나 인민 교사가 됐다. 미국, 일본에 진출하기도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90년대 중반 이후에 기근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을 도우려고 북·중 국경 지역을 갔다가 그곳에 탈북자 고아가 많다는 것을 알고 후원을 시작했어요.”
11살 때 신앙 자유 찾아 홀로 월남
부친 김관주 목사, 북에서 50년에 순교
90년대 중반 이후 북 주민 돕기 앞장
“거액 북 돕기 쓴 한경직 목사 등 영향”
20년간 불교 등 5개종단 종교인 모임도
중국 조선족 고아 등 3천여명에 후원금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한 살 때부터 신의주에서 자란 그는 11살 되던 48년 8월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홀로 삼팔선을 넘었다. 북에 부모와 동생 셋을 두고 서울에 사는 이모 주소가 적힌 쪽지 한장을 들고 월남했다. 그의 부친은 한경직(1903~2000) 목사의 초청으로 신의주 제2교회에서 부목사를 한 뒤 47년에 평양 서문밖교회 목사로 사역하다 공산당 정부와 타협하지 않아 평양 외곽 사동탄광에 수용돼 한국전쟁 직전에 순교한 김관주 목사다. ‘주일을 바로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하러 남으로 가겠다’는 장남의 결심에 탄광에서 고초를 겪던 부친은 아들을 한참 바라본 뒤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단다. “평양 제5인민학교 다닐 때 2년 동안 주일에 교회 가고 학교에 안 왔다고 매도 맞고 일주일 정학까지 당했죠.”
김 목사가 월남하던 해 평양서문밖교회 목회자와 유년부 신자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7번째 하얀 옷을 입은 이가 11살 김명혁 목사다. “아버지는 탄광에 끌려가 사진에는 없어요.”(김명혁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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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가 늘 가지고 다닌다는 종이 쪽지에는 죄를 고백한 문구가 가득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
그는 남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외치다 고초를 겪었다. “박정희 정부 때인 77년에 학도호국단 군사훈련을 주일에 한다고 여러 신문에 글을 써 비판했어요. 그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어요.”
그는 90년대 중반 이후로 북한 주민 돕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95년에 북한을 돕자는 스티브 린튼 박사(유진벨 재단 이사장) 전화를 받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등을 통해 북한에 식량이나 약품, 의료 기구 등을 보냈어요.” 그는 2002년부터 15년 동안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북 체제에 희생당한 목사의 아들은 어떻게 북한 돕기에 앞장섰을까. “내가 존경하는 존 스토트 박사(1921~2011)나 한경직 목사의 영향일 수 있겠죠. 한 목사는 종교계의 큰 상인 템플턴 상을 92년에 받고 상금 전부를 북한 돕기에 썼어요. 성공회 신학자인 스토트 박사는 교회일치(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비판하면서도 협의회 모임에는 꼭 참석했어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두를 끌어안는 폭 넓은 신학을 하셨죠. 이분들을 보면서 배웠어요.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잖아요.”
그는 지난 20년 동안 매달 한 차례 다른 종단 성직자들과 만나 밥도 먹고 생각도 나누고 있다. 불교와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와 개신교 등 5개 종단 성직자 8명이 참여하는 ‘민족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 모임’이다. “민족 뿐 아니라 세계의 화해와 통일을 도모하는 게 우리 모임의 기본이죠. 그동안 남북 관계가 어려울 때 성명도 열댓 번 냈고 이명박 대통령 때인 2010년에는 정부와 싸워 밀가루 300톤을 북한에 보냈어요.”
기독교계에서 다른 종단과 함께하는 활동에 곱지 않은 시선도 있는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기독교 대표 이승훈 선생이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 선생을 앞세워 한 게 3·1 운동입니다. 타 종교 지도자와 함께했다고 나를 비판한다면 3·1 운동도 비판해야죠. 한국교회의 아버지인 길선주 목사도 3·1 운동 민족대표이니 길 목사도 비판해야 합니다.”
그는 현재 한국 기독교 뿐 아니라 세계가 갈라져 싸우고 있다면서 먼저 한국 기독교계에 이렇게 당부했다. “한국 교회는 회개를 많이 하고 정성껏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고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모두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사회를 향해서는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3·1 운동 정신으로 사는 게 좋아요. 3·1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민족 독립을 추구하면서도 민족주의를 초월하고 세계주의를 지향했어요. 다른 종교도 포용하고 아시아 평화를 위해 함께했죠. 애국가 정신도 이어받아야 해요. 가사 중에 ‘하느님 보우하사’는 자기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담겼어요. ‘삼천리 화려강산’에는 자연을 사랑하는, ‘대한 사람 대한으로’에는 남과 북이 서로 끌어안아야 하다는 생각이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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