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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강간당한 10대 괜찮단 말이 성관계 동의냐" 원심 꾸짖은 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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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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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당한 직후의 고등학생에게 접근한 남성 A씨. “괜찮냐”고 묻긴 했지만, 그 다음 행위들은 말과 달랐다. “괜찮다”고 답했지만, 경황이 없던 피해자 B씨를 A씨는 성폭행한다.

A씨가 군에 입대한 뒤 시작된 A씨의 재판. 사건을 심리한 보통군사법원과 고등군사법원은 A씨에게 적용된 준강간 혐의를 입증할 수 없다며 잇따라 ‘무죄’를 선고했다.

올해 7월 사건을 받은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4개월만에 A씨에게 무죄를 준 판결을 깨고 사건을 군사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에 와서야 인정된 준강간, 어떻게 된 일일까.



엇갈린 피해자-피고인 진술…피고인 말 모순 찾은 대법원



사건은 2014년에 발생했다. A씨는 지인 2명 및 피해자 B씨와 함께 지인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B씨는 당시 고등학생, A씨도 만18세였다. 참석자들이 만취했을 새벽 무렵, 화장실에 간 지인이 술에 취한 B씨에게 강제로 성행위를 한다. A씨는 지인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뒤이어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B씨를 성폭행했다.

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A씨는 “합의에 따른 관계였고, B씨가 이미 성폭행당한상태인 줄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피고인과 피해자의 주장은 많은 부분에서 엇갈렸다. 1ㆍ2심 법원은 피고인의 진술이 더 신빙성 있다고 들어줬다. 하급심은 “피해자는 강간 직전 상황과 강간 중의 상황은 기억하면서도 강간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유독 기억 못 하는데, 이는 합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이 판단이 잘못됐다고 봤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B씨는 구토를 하는 등 상당히 취해있었다. 첫 번째 성폭행을 당한 직후였고, 잇따라 발생한 A씨의 성폭행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상황을 일부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다.

오히려 대법원은 A씨의 기억이 당시 상황이나 주변 증인들의 증언과 모순점이 있단 점을 찾아냈다. A씨는 “B씨가 성폭행당한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차 성폭행 당시 A씨와 함께 거실에 있었던 다른 지인은 “화장실에서 성관계 소리가 들려 화장실에 가서 노크했다”고 진술했다. 대법원은 “집 구조상 거실과 화장실 위치가 그리 멀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A씨는 B씨가 1차 성폭행을 당했다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강간 피해자의 ‘괜찮다’가 ‘성관계 동의’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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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 무죄 판결을 깨고 사건을 군사법원으로 돌려보낸 주심 박상옥 대법관. [청와대사진기자단]


쉽사리 수긍되지 않는 A씨의 주장은 또 있었다. 자신은 용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갔을 뿐이고, 화장실에 있던 B씨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뒤 B씨가 “괜찮다”고 답해 성관계로 나아갔다는 주장이다. 대법원은 “알몸으로 있는 피해자에게 구조를 위한 조치 없이 호감이 있다며 성행위 동의를 구했다는 건 그 자체로 모순되고 경험칙상 이례적”이라고 했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괜찮다"는 말을 A씨나 하급심 판결처럼 해석해선 안 된다고 꼬집었다. 피해자는 A씨에게 "괜찮다"고 여러 번답변했지만, 이 의미에 대해 검찰 조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스스로가 강간의 피해자가 되는 부분이 가장 무서웠던 것 같고 강간 피해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그냥 무슨 대답이든 괜찮다고 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제가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어요”라고 말이다.

이런 기록은 법정에도 제출됐지만, 군사법원은 이를 제대로 심리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피해자의 '괜찮다'는 답변은 이미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 형식적인 답변에 불과할 뿐 A씨와의 성행위에 동의한다는 답변으로는 볼 수 없다”며 원심의 판단이 납득이 안 된다고 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 ▶사건 이후 정황 ▶피해자의 고소 경위 등 다양한 측면에서 성폭행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에 대한 판단이 담겼다. A씨는 자신의 무죄 근거로 사건 이후 B씨를 집에 데려다주기도 했고 연락도 주고받았다는 등의 주장을 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런 A씨 주장도 모두 배척했다. 대법원은 “사건 이후 정황만으로 피고인이 피해자 동의를 얻었다고 볼 수 없고, 시일이 지나 고소하게 된 경위에도 특별히 의심할만한 사정은 없다”고 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최근 대법원 판결을 보면 성범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 판결은 모두 깨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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