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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 김영삼이라고? 국민의힘, 너무 나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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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문재인 공격하려다 맥락 건너뛴 엉터리 역사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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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찰총장 직무 복귀 ▲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직무 배제 결정으로 출근하지 못했던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으로 출근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국민의힘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두둔하면서 정치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 2일엔 윤석열 총장을 김영삼 전 대통령에 견주는 말까지 나왔다. 비상대책위원장-중진의원 연석회의에 배석한 정진석 의원의 발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되풀이되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으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의 몰락은 고집스러운 정치권력이 야당 총재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데서부터 촉발됐다.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못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장면이었다. 지금 현 정권은 눈엣가시 같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찍어내려고 하고 있다. 윤석열 찍어내기의 후폭풍은 김영삼 찍어내기 후폭풍의 데자뷔가 될 수 있음을 현 정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 의원은 윤 총장이 추미애 법무부장관에 맞서고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사실상 맞서는 상황을 1979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 정권에 맞선 상황에 비유했다. 김영삼 총재직 박탈 및 의원직 제명이 10.26 사태와 박 정권 몰락으로 이어진 것을 '김영삼 찍어내기 후폭풍'으로 규정하면서 '윤석열 찍어내기'도 비슷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훗날 6월항쟁의 뜻을 거스르는 3당 합당을 벌이고, IMF 외환위기를 초래하는 과오를 범하긴 했으나 1979년의 김영삼은 유신독재에 맞서 싸우는 민주투사였다. 김영삼의 행동은 자기 조직의 이해관계가 아닌 국민적·시대적 열망을 반영했다. 반면 윤석열은 검찰개혁 및 검찰 위상 저하로 인한 검찰 조직의 불만을 상징한다.

1979년 김영삼이 대변한 건 민주주의와 약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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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을 접견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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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기를 꺾고자 박정희 정권은 1979년 9월 8일 법원을 앞세워 신민당 총재직을 정지시키고 10월 4일 공화당과 유신정우회(유정회, 국민 직선이 아닌 대통령 추천으로 뽑힌 의원들 모임) 소속 국회의원들을 앞세워 의원직을 제명했다.

김영삼을 대상으로 한 총재직 박탈과 의원직 제명은 불명예가 아니라 '훈장'이었다. 이는 그의 용감한 투쟁으로 증명된다. YH무역 사건 때 보여준 그의 모습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 최대의 가발 수출업체였던 YH무역은 1970년대 중반부터 경영난이 심해지고 노동조합 활동이 활발해지자 1979년 3월 30일 '4월 말 폐업'을 공고하고 회사를 방기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이 나서서 회사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다 허사였다. 사주와 정부와 은행(회사 채권자)은 노동자들의 열망을 외면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4월 13일부터 회사에서 농성을 개시했고, 8월 9일에는 신민당사로 장소를 옮겼다.

박정희 정권과 재벌이 노조활동을 빨갱이인양 매도하던 시절이었다. 기득권이 노동자들을 외면하는 상황에서 신민당과 김영삼 총재는 기꺼이 농성장을 제공했다. 경찰 병력이 신민당사를 포위한 가운데, 52세의 김영삼은 의지할 데 없는 노동자들을 아래와 같이 대했다.

"9일 오전 여공들은 동대문구 면목동 공장 기숙사에서 삼삼오오 당사로 모여들었는데, 김영삼 총재는 긴급총재단회의를 열고 여공 대표 5명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뒤 농성 장소인 4층 강당에 올라가 '동생 같고 딸 같기도 한 여러분들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을 찾아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고 인사. 김 총재는 '여러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경제가 없었을 것'이라면서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약속." - 1979년 8월 10일 <동아일보>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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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H무역 여공들 신민당사에서 농성.1979.8.10 (연합뉴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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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명박 정권 때인 2008년 6월 30일 <프레시안>에 실린 '야당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게 배워야 할 것'이란 기사의 일부다.

"(1979년 8월) 9일부터 10일까지 김영삼 총재와 당시 신민당 의원들은 당사 주변을 규찰하며 정보과·보안과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발길질을 하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중략) 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 결정이 났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이를 재가했다.

11일 새벽 경찰이 신민당에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순구 서울시경 국장이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당직자에게 요구했지만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전화를 받지 않고 오히려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장을 만나자 '너희들이 저 여공을 다 죽이려 하냐'고 뺨을 올려붙였다."


당시는 정권이 긴급조치라는 도구를 통해 군대·경찰을 앞세워 국민들을 탄압하던 때였다. 김영삼의 행동은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박 정권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박 정권을 어쩌지 못하는 지미 카터 대통령에 대해서도 그해 9월 16일 <뉴욕타임스> 기자회견을 통해 쓴소리를 했다.

그해 9월 19일 치 <경향신문> 1면에 게재된 번역문에 따르면, <뉴욕타임스>는 "한국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 때문에 구속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여겨진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카터 미 행정부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 대한 지지를 종식시킬 것을 요구했다"고 한 뒤 이렇게 보도했다.

"구속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계속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카터의 박 대통령 방문에 언급, 김 총재는 통역을 통해 '카터는 한국에 옴으로써 박 대통령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주었다'면서 '카터는 한국에 와서 박 대통령의 위신을 높여줌으로써 박 대통령에게 그 반대 세력을 말살할 용기를 주었다'고 말했다."

정진석 의원님, 엉터리 역사 강의 하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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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석 의원. 사진은 지난 10월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의 주일대사관, 주중대사관에 대한 화상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는 모습. ⓒ 공동취재사진



김영삼은 정권과 재벌체제는 물론 배후의 미국도 비판했다. 오늘날은 물론 당시 관점으로 봐도 대단한 행동이었다. 그런 1979년의 김영삼을 2020년의 윤석열과 비교하는 정진석 의원의 발언은 윤석열에겐 어떨지 몰라도 김영삼에겐 그다지 영예롭지 않은 일일 것이다.

윤석열의 행동이 대변하는 것은 검찰 조직의 이해관계, 검찰 개혁에 불만인 보수 기득권 세력과 보수정당의 이해관계다. YH 노동자들을 감싸면서 기득권에 맞선 1979년의 김영삼을 윤석열과 비교하는 건 역사의 맥락을 무시하는 어불성설이다.

1960년생인 정진석은 10대 시절부터 정치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정진석은) 정치적으로도 어릴 때부터 끼가 있었다. 서울 성암초등학교 6학년 정진석은 학교가 홍익대 재단에 통합되면서 교명이 없어지자 '성암초등학교 교명을 지켜달라'며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성동고 학생회장을 할 때는 카터 미 정부가 우리나라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로 인해 온 국민이 궐기에 나서자, 재학생들을 이끌고 신당동 로터리까지 진출하는 고교 반미 시위를 주도했다고 한다." - 2014년 2월 18일 <디트뉴스24> '정진석 입당에 박근혜 개인 논평' 기사 중

정 의원은 어려서부터 정치에 민감했다니 박정희에 맞선 김영삼의 투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또 유신체제가 선포된 1972년, 정 의원의 부친 정석모는 지금의 경찰청장인 치안국장이었다(이후 충남도지사, 국회의원이 됐다).

아버지가 유신체제의 한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정진석은 유신에 저항하는 김영삼에 관심을 가질만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만 24세 때인 1984년부터 <한국일보> 기자로 정치 현장을 취재했으므로, 1979년 김영삼의 민주화투쟁이 갖는 역사적 맥락을 모르고 살아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 인물이 "박정희 정권의 몰락은 고집스러운 정치권력이 야당 총재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데서부터 촉발됐다"면서 윤석열 총장을 김영삼 총재의 화신인 양 운운했다. 1979년의 역사적 맥락을 잘 몰라서가 아니라, '김영삼 찍어내기 후폭풍의 데자뷔'가 윤석열로 인해 일어나주길 바라는 마음이 강렬해 보인다. 그러니 이런 엉터리 역사 강의가 나왔는지 모른다.

김종성 기자(jkim08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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