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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수천번의 망치질로 방짜유기 탄생… 3대째 잇는 ‘장인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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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째 유기 전통 잇는 이봉주 방짜 유기장 가문

코로나19로 올해 매출 급감…뜸해진 결혼식 영향

상업화 유혹에도…이형근 유기장 "무형문화재 전통 고수"

은행 그만두고 뛰어든 이지호씨…"유기 외연확장 시도"

자처하고 짊어진 전통과 현실의 짐…"당연히 해야 할 일"

[경기 안양=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뚱땅뚱땅`

11월인데 선풍기가 쉼 없이 돌아갔다. 불 앞에서 유기(鍮器)와 씨름하는 그의 이마에서 땀이 떨어졌다. 메질이 선풍기 모터 소리를 덮듯이, 바람으로도 식히지 못하는 열기였다. 지난달 18일 찾은 경기 안양의 이형근(62) 방짜 유기장(국가무형문화재 77호)의 공방은 초겨울 삭풍을 빗겨가나 싶었다. 이 유기장은 “추운 날씨는 견뎌도, 불경기는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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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근(왼쪽) 유기장이 작업하는 모습을 전수자 이지호씨가 지켜보고 있다. 방짜 유기는 사진처럼 불에 달궈서 망치로 때려서 모양을 잡는다.(사진=전재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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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이 띄엄띄엄 돌아간 건 올해부터다. 전에도 어려웠지만 직원 스무 명을 건사할 만큼은 됐다.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작년 매출의 30% 수준까지 일감이 줄었다. 식구 같은 베테랑 직원들이 사표를 들고 찾아왔다. 그들을 붙잡고자 비용을 줄였다. 주중 돌아가던 공방을 사흘만 가동하기로 했다.

결혼식이 뜸해진 게 컸다. 유기는 예단으로 인기가 좋은 품목이라 타격을 받았다. 형식을 줄이고 실속을 챙기려는 세태도 무시하지 못한다. 공방 살림을 책임지는 이 유기장의 부인은 “부동산이 오르니까 예단을 줄여서 집사는 데 보태는 게 요즘 추세라고 한다”고 말했다.

1983년부터 유기를 만진 이 유기장은 격세지감이다. 없어서 못 팔 때도 있었다. “일요일은 일을 쉬고 교회를 다니는데,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나를 만나려고 교회 앞에 고객들이 줄을 서기도 했다”고 전성기를 기억한다. 물량을 먼저 확보하려는 경쟁이었다. 실제로 유기는 해방 이후 사치품으로 인기가 좋았다. 군사정부 시절 산림녹화를 위해 장작 사용을 금지하는 바람에 수요가 감소(유기는 연탄가스와 접촉하면 변색함)했는데, 데모용(꽹과리·징)으로 팔려나간 건 아이러니다. 서울올림픽 전후에 기념품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에 농악 장려 차원에서, 드라마 ‘상도’·‘대장금’(2001~2003년) 이후에 한류 열풍 수혜를 받았다. 욘사마(배우 배용준)가 이 유기장의 식기를 공수해서 일본 현지에 한식당을 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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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근(왼쪽) 유기장과 전수자 이지호씨. 이씨가 손에 쥐고 만들던 좌종은 메질을 견디지 못해 깨졌다. 보름 넘게 들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순간이었다. 유기는 달궈서 때려 모양을 잡아가는데, 더 달구거나 더 때리면 구멍이 난다. 그는 “사람 마음이 그렇다”며 “작업을 하려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사진=전재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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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렇다 할 부흥의 전기를 맞지 못했다. 유기는 어느새 변방으로 밀린 지 오래다. 도심에 있던 공장은 한참 전에 외곽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기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민원 탓이다. 스테인리스와 도자기가 식기를 대체하면서 식탁에서 비빌 자리도 좁다. “농악 교재, 무속인 바라(놋쇠로 만든 타악기로 심벌즈와 모양이 비슷), 결혼 예단 정도로 나가는 게 전부예요.” 그나마 이 유기장은 무형문화재라서 형편이 나은 편이라고 한다.

자부심으로 버티는 일이다. 방짜 유기는 구리 78%와 주석 22%를 오차 없이 섞어서 만든다. 고온에 달궈, 망치로 치기를 반복해 틀을 잡아나간다. 오롯이 사람 손으로 한다. 한 달 넘는 작업도 숱하다. 생산량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대신 모든 제품은 세상에 하나뿐이라 특별하다. 양산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매화는 평생을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고 했다. 이 유기장 고집은 매화를 닮았다.

“유기 공장에서 찍어내는 그릇은 저렴해서 우리가 대적할 수가 없어요. 상업화도 고민해봤지요. 그런데 저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이유가 공장을 돌리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테지요.”

왕관의 무게를 덜어주고자 나선 이가 전수자 이지호(34) 씨다. 둘은 부자관계다. 그 좋다던 외환은행에 다니던 아들이 고생을 자처하려고 하자 처음엔 반대했다. 아들이 뜻을 굽히지 않아 2015년 수하로 들였다. 3대가 현직에서 유기 전통을 잇는 가문은 이씨네가 유일하다. 이씨의 조부이자 이 유기장의 부친은 국내 1호 방짜유기장 이봉주(95)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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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근(왼쪽) 유기장과 이지호 전수자 부자가 맞잡은 손. 38년째 메질을 이어온 이 유기장의 손은 궂은살이 박여 투박하다. 이 유기장은 자신은 부친 이봉주 유기장에 비할 게 못된다고 했다.(사진=전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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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컴은 앞다퉈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카메라가 꺼지고 닥치는 현실은 이씨 몫이다.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금속공예전공 석사 과정을 밟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기술을 익히려면 이론도 닦아야 했다. 주경야독하기를 2년째다. 유기의 외연을 공예품으로까지 확장하는 게 목표다. “도자기가 식기에만 머물렀다면 금세 사양길로 접어들었을 테죠. 유기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3대 유기 전수자로서 우뚝 서려면, 3세대 경영인으로서 먼저 독립해야 하는 게 순서다. 다섯 살 자식을 둔 아비로서 가지는 고민이기도 하다. 고민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은 곁에서 묻는다. 좋은 직장 때려치우고 전통과 현실의 짐을 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이씨는 늘 같은 대답을 한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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