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똑같은 라면 출고가, 이면엔 ‘정보교환’…해외서라면 ‘담합’ 처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 입장차

[경향신문]

경향신문

서울 시내의 한 대형마트 라면 코너에 다양한 종류의 라면이 진열되어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같은 업계에서 경쟁하는 회사들과 정보를 교환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할 수 있을까.’

정부가 지난 8월 발의한 공정거래법 전면개정안에 담긴 ‘정보 교환 담합’ 내용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와 업계의 입장차가 뚜렷하다. 개정안의 핵심은 담합으로 이어질 수 있어 금지되는 기업들 간 ‘합의’ 유형에 ‘가격·생산량 등 정보를 주고받아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를 추가한 것이다.

기업들이 향후 가격 인상 계획과 생산량 등 생산·판매 정보를 교환하는 행위를 통해 사업상 불확실성을 줄이고, 시장 경쟁을 피할 수 있다고 공정위는 보고 있다. 이 같은 행위가 결과적으로 소비자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간 법원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정보 교환 행위의 위법성을 인정하지 않아왔다.

■ 경쟁 해치지만 담합은 아니다?

공정위 가격 인상 ‘과징금 부과’에
대법원 “합의로 볼 수 없다” 판결
해외 ‘경쟁 저해’ 모든 합의 금지

정보 교환 담합 규제 강화 논의를 촉발시킨 대표적인 사건은 2015년 대법원의 라면 담합 무효 판결이다. 공정위는 농심·삼양·오뚜기·한국야쿠르트 등 국내 4개 라면업체가 가격 인상률과 인상 예정일, 신제품 출시 예정일, 예정 판매가 등 내부 정보를 주고받으며 2001년부터 10년간 여섯 차례 가격을 인상했다는 혐의로 과징금 1362억원을 부과했다. 매번 가격 인상률은 업체들 간 소폭 달랐지만, 인상 결과 각사 주력 상품(신라면·삼양라면·진라면·왕라면) 출고가격이 같아졌다. 라면업체들이 불복해 소송을 냈지만 서울고법은 공정위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담합 인정의 전제조건인 ‘합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2015년 제재를 취소했다.

공정위가 합의 근거로 제시한 라면업체들의 정보 교환 행위에 대해 대법원은 “경쟁제한 효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면서도 “그 자체를 합의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1위 사업자인 농심에 맞춰 다른 사업자들이 가격을 따라 올리는 관행이 있었기에 합의 필요성도 낮았다고 설명했다.

16개 생명보험사가 2001~2006년 미래의 예정이율 등 정보를 교환한 이후 예정이율을 낮춘 사건에서도 사법부 판단은 동일했다. 예정이율 인하는 보험료 상승으로 이어져 소비자 부담을 키울 수 있는 요인이었다. 대법원은 2014년 “정보 교환은 의사결정의 불확실성을 제거해 담합을 촉진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서도 “정보 교환만으로는 경쟁을 제한하는 합의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과징금 3653억원을 취소했다. 생명보험사들이 공유된 정보를 활용해 예정이율을 나름대로 계산했다는 점도 판단 근거였다.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부당 정보 교환 규제는 세계적 추세

한국과 달리 해외 경쟁당국과 법원은 경쟁제한 우려가 있는 정보 교환 자체를 금지하고, 담합 의심 시 정보 교환 행위를 합의의 결정적 증거로 추정하는 등 강하게 규제한다. 해외였으면 라면업체들의 담합이 처벌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경쟁법 전문가들도 있다.

미국은 한국의 공정거래법과 같은 ‘셔먼법’ 제1조에서 정보 교환을 포함해 경쟁을 해치는 모든 합의를 금지한다. 엑손 등 14개 정유사가 관리·전문·기술직 직원의 임금 정보를 교환해 임금을 적게 준 사건에서 미국 법원은 2001년 “합의의 직접 증거가 없더라도 담합 조장행위를 했다는 등의 추가 요인이 있다면 담합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위법성을 인정했다.

유럽연합(EU)은 사업자들이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경쟁을 피할 목적으로 협력하는 수준의 ‘동조적 행위’까지도 담합으로 규제한다. 동조적 행위에 정보 교환 행위도 포함된다. 2015년 유럽사법재판소는 3개 바나나 수입업체가 가격 발표일 하루 전 전화로 가격정보를 나눈 것 자체가 “경쟁을 해치려는 목적”이라며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공정위는 이러한 추세에 맞춰 정보 교환 담합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담합에 따라 대규모로 발생할 수 있는 소비자 피해를 방지하고, 기업들의 규제 인식 수준을 높여 해외에서 기업활동을 할 경우 정보 교환 담합으로 처벌될 위험을 낮추는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 일상적 정보 교환도 위축될까

‘값·생산량 정보 교환 제한’ 신설
재계 “품질 저하로 소비자 손해”
국회 논의 과정 일부 수정 가능성

반면 재계는 규제 도입으로 사업활동에 필요한 정보 교환까지 위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은 “정보 교환으로 소비자 트렌드와 최신 상품 경향 등을 파악해야 소비자에게 질 좋은 상품을 제공할 수 있다”며 “이러한 정보 교환을 처벌하면 원가 상승·품질 저하 등으로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소비자에게도 손해”라고 밝혔다.

공정거래법 전면개정안을 심사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전문위원도 검토보고서에서 “경쟁을 유도할 수 있는 행위에 필요한 정보 교환까지도 전면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시장 경쟁을 해치지 않는 정보 교환은 제재 대상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을 돕거나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시장 동향을 공유하는 등 소비자 후생과 사업 효율성을 높이는 정보 교환이 이에 해당한다. 아울러 국회 정무위에는 ‘법안 논의 과정에서 규제 대상이 되는 정보 교환 내용을 구체화하는 등 일부 수정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박광연 기자 lightyear@kyunghyang.com

▶ 인터랙티브:자낳세에 묻다
▶ 경향신문 바로가기
▶ 경향신문 구독신청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