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영화로 본 마리 퀴리의 삶...천재과학자의 도전과 고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화학 분야에서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

당시 남성 중심의 과학계에서 타고난 재능과 호기심으로 연구 지속

노벨상을 두 번 이상 수상한 단 4 명 중 한 명, 여성 중 유일

1차 세계대전에서 이동식 'X-선 촬영기 장착한 구급차 직접 몰고 병사들 살려

케미컬뉴스

마리 퀴리 역을 맡은 영국 배우 로자먼드 파이크 /다음 영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세계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까지 동시에 받은 유일한 천재 과학자 '마리 퀴리', 그녀의 삶이 궁금했었다.

최근 그녀의 삶을 비춘 영화가 나왔다는 소식에 냉큼 달려간 영화관 안에는 코로나19의 여파로 나를 포함해 4명만이 관람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지금도 쉽지 않은데 그 시대에 여성 과학자로서 어떻게 그런 위대한 발견과 도전이 가능했던 걸까.

그녀의 본명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다.

여성에게 투표권조차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에 남성 중심의 과학계에서 거침없는 성격이던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호기심으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 피에르 퀴리(샘 라일리 분)와의 만남과 사랑으로 공동 연구를 진행하게 되고, 1898년 우라늄 광석인 피치블렌드(pitchblende, 역청 우라늄석) 성분을 분리해 베크렐이 연구했던 우라늄보다 감광 작용이 4배나 강한 새로운 물질을 발견한다.

케미컬뉴스

영화 '마리 퀴리' /ⓒ씨네큐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퀴리 부부가 발견한 새로운 두 가지 원소 중 하나는 조국 폴란드를 기리는 의미로 '폴로늄'이라 명명했다. 마리 퀴리는 우라늄이나 폴로늄 같이 자연계에서 감광, 전리, 형광 작용을 나타내는 물질들에 대해 처음으로 '방사능'이라고 부르고, 이 물질에서 나오는 빛을 방사선이라고 명명했다.

또 감광 작용력이 우라늄보다 250만 배나 강한 원소를 발견해 강력한 빛을 방사한다는 뜻으로 '라듐(Radium, 88Ra)'이라고 명명했다. 1902년에는 8톤의 폐우라늄 광석을 처리해 0.1g의 순수한 염화 라듐을 얻어냈으며 1903년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노벨상에 이름을 올린다.

영화 속 그녀의 남편 피에르 퀴리는 늘 아내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성품으로 나오지만 갈등도 발생하게 된다.

남편과 함께 공동연구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오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어 남편이 홀로 수상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부부 다툼의 원인이 된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해낸 연구 성과가 심지어 남편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마리 퀴리는 결국 화를 내고 만다.

삶에 있어서 좌절할만한 수많은 이유들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연구에 몰두했던 마리 퀴리는 1906년 피에르 퀴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그녀의 삶은 황폐해지고 만다. 그러나 절망에서 다시 일어서 파리 대학의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고, 1910년에 염화 라듐을 전기 분해시켜 금속 라듐을 얻어낸다.

이후 피에르의 제자 랑겐빈과의 스캔들로 주변의 힐난에도 연구를 이어갔으며 1911년에는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과 그 화합물 연구로 마리 퀴리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케미컬뉴스

영화 '마리 퀴리' /다음 영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 동안 퀴리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돕기 위해 당시 아직 의료계에서 생소했던 이동식 'X-선 촬영기를 장착한 구급차를 직접 몰고 큰 딸인 이렌과 함께 전선을 누볐으며, 몸에 박힌 총알이나 파편을 X-선 사진으로 쉽게 확인해 많은 병사들을 살려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신문에 따르면 그녀는 1916년 자동차 운전면허를 취득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다.

그녀의 노력과 끈기를 곁에서 지켜본 큰 딸 이렌은 마리의 조수 프레데릭 줄리오와 결혼해 과학자 부부의 대를 이어 1935년에 인공 방사능 연구로 부부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케미컬뉴스

영화 '마리 퀴리' /ⓒ씨네큐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마리 퀴리는 연구를 위해 늘 잠자리 침대에서도 라듐을 손에 들고 있거나 머리맡에 두곤 했는데 이로 인해 상당한 선량의 방사선이 노출되고 말았다.

그당시는 방사선에 대한 유해성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그녀 자신조차 유해함을 알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그녀는 1920년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어 청각과 시력을 잃기 시작했으며, 전리 방사선으로 인한 재생 불량성 빈혈을 앓았다. 1934년 그녀가 사망하기까지 영화 속에서 비치는 마리 퀴리의 모습은 자신이 발견한 물질로 인해 세상에 이로움과 해로움을 함께 준 데에 대한 고뇌가 그려진다.

마리 퀴리의 둘째 딸인 이브 퀴리는 그녀의 과학자 가족들과 달리 저널리스트이자 피아니스트, 작가였다. 이브는 어릴 적 과학에 흥미와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길을 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아프리카, 소련, 아시아에 전쟁 특파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가족과는 다른 선택 덕분인지 모르지만 어머니 마리 퀴리가 죽은 후 그녀의 전기를 써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재미있는 일화 중에는 이브 퀴리가 "우리 가족은 5개의 노벨상을 탔는데, 부모님과 언니, 형부, 남편까지 노벨상을 탔지만 나만 실패해 가족에게 수치심이다"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평생을 불가능과 맞서 싸운 천재 과학자 마리 퀴리는 힘든 시련과 역경에도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강인하고 신념에 찬 인물로 영화 속에서 빛나는 감동을 선사한다. 코로나19로 힘겨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한 힘과 용기를 그녀의 삶을 통해 들여다보기를 추천한다.


케미컬뉴스 유민정 기자 (mjyoo@chemicalnews.co.kr)

<저작권자 Copyright ⓒ 케미컬뉴스. Chemistry is everywhe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