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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금)

이슈 미술의 세계

`예술이 별건가`…기성 미술계를 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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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970년대 최병소는 의자 배열로 획일적인 교육을 비판하고, 주변 흔한 소재로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질문했다. [사진 제공 = 아라리오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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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잡지, 의자, 연필, 볼펜, 우산, 술병, 가방, 안개꽃, 분필, 윷···.

1970년대 대학을 갓 졸업한 가난한 예술가는 비싼 캔버스와 물감, 붓 대신 주변의 사물을 작품 재료로 사용했다. 1975년 '대구현대미술제'에 접이식 의자 8개를 나란히 배열하고 의자 3개는 뚝 떨어뜨려 놓은 후 바닥에 흰색 테이프로 표시한 설치 작품 '무제 9750000-3'을 설치해 한국 실험미술 선두주자가 됐다. 의자 만으로 질서에 순응하는 집단과 일탈한 개인을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관점에 따라 의자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 존재와 부재의 차이로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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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격동 아리리오갤러리 개인전 '의미와 무의미'에서 이 작품을 재현한 최병소 작가(77)는 "획일적인 교육을 하던 중·고등학교 시절 교실 의자가 생각나 만든 작품이다. 밖으로 튀어나온 의자는 단체생활에 서툴렀는 나를 은유한다"고 말했다.

의자 설치 작품과 나란히 대구현대미술제에 출품한 사진 작품 4점이 이번 전시장 벽에 걸려 있다. 의자에 신문, 가방, 우산, 술병을 놓고 찍은 사진 상단에 newspaper, suitcase, umbrella, bottle을 각각 인쇄한 사진 작품 '무제 9750000-2'로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묻는다.

작가는 "젊었을 때 돈이 없어 가장 일상적이고 흔한 것들로 작업을 했다"고 설명하면서 "예술이 엄청난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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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1975년작 무제


"왜 어렵게 예술을 하나요. 예술에 대한 환상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다 버리고 그림을 바로 봐야 합니다. 그림다운 게 좋은 작품이지 심오한 사상이 있는게 아니에요. 충실히 작업했는지 안했는지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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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0170712 무제


의자 위 정물 사진들은 과거 작가의 대구 작업실이 침수됐을 때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 사진을 이용한 설치 작품 '무제 9750000-1'(1975)과 함께 살아남은 1970년대 작품이다. 이번 개인전 천정에 매달린 잡지 작품은 노닐고 있는 두 마리의 새 사진과 그 상황을 설명하는 영어 단어 sky, cloud, wind, birds, flying 등을 배열한 종이가 나란히 펼쳐져 있다. 언어 만으로는 현실 상황을 제대로 담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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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개인전 의미와 무의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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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작가 개인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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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놓인 안개꽃 설치 작품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꽃잎이 떨어진 자국을 표시한 분필이 함께 놓여 있다. 작가는 "가장 흔한 안개꽃을 손으로 툭 쳐서 만든 작품이다. 유별난 생각을 가지고 한게 아니고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술이 별건가'라는 생각으로 기성 미술계를 뒤흔든 그의 작품 세계는 윷 6개를 군용 담요에 놓은 1974년작 '무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작가는 "원래 윷 4개로 하는 놀이인데 6개를 놓으면 룰(규칙)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미술도 과거의 룰로는 새로운 작품을 못 만든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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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작가가 잡지로 만든 1975년작 무제


잉크없는 볼펜으로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의 저서 '의미와 무의미' 낱장 모서리를 긁어낸 1998년작 '무제 998'은 이번 개인전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는 "의미가 있으면서도 무의미한 작품"이라고 했다.

1976년부터 지속해온 그의 대표작인 신문 지우기 연작도 전시장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신문을 읽고 볼펜과 연필로 그 위를 까맣게 덮는 작업을 반복해왔다. 개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사건 사고를 기록한 신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지우면서 그 자신도 지웠다.

"그리는 재주가 별로 없어요. '꼭 그려야 되나' 생각하다가 차라리 기사로 꽉 차 있는 신문을 지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고 판단했죠. 처음에는 볼펜으로 지우다가 찢어지면 연필로 덧칠해 화랑에 가져갔더니 아주 좋아하더군요. 신문을 통해 사회와 문화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부도 하고 1석2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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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작가의 2020년 신문 작품 0201012 무제(왼쪽), 0200815 무제(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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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가까이 신문 지우기를 반복해왔지만 앞으로도 계속할 계획이다. 새로운 것이 자꾸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작업하다 보면 손의 방향, 속도가 달라지고 재료도 달라져요. 내가 죽지 않는 한, 신문이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 지우기 작업을 하고 싶어요. 신문을 지우면서 나를 지우면 수양이 됩니다."

세탁소 철사 옷걸이 8000개를 구부린 2016년 설치작 '무제 016000'도 이번 전시장 바닥을 가득 채운다. 그는 "어딜 가든 다 있는 재료이며 종이처럼 구겨진다"고 했다. 예나지금이나 참 일관성 있게 작업 소재를 선택하고 있다. 전시는 내년 2월 27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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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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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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