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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김택진 ‘야구 찐사랑’…“덕후는 선수의 빛 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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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다이노스 구단주이면서

늘 선수들 두걸음 뒤에 서 주목

우승 세리머니 때도 뒷자리 유지

집행검 장면선 “스태프”로 불려져

트로피 들고 ‘영웅’ 최동원 묘소 참배


한겨레

엔씨다이노스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우승 세리모니 뒤 김택진 구단주를 헹가래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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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덕후는 좋아하는 스타의 빛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옷을 적셔서라도 스타를 빛낸다. 자신을 드러내는 건 진정한 덕후의 자세가 아니다.” 덕후(찐 팬)들의 세계를 그린 한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이다.

공룡 군단 엔씨(NC)다이노스가 2020 케이비오(KBO)리그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를 석권하는 통합우승을 이룬 가운데, 김택진 엔씨 구단주(엔씨소프트 창업자 겸 대표)의 야구 덕후 스타일이 화제다. ‘찐야구덕후’(진짜 야구광)의 자세를 보여줬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엔씨가 7전 4선승제 한국시리즈에서 4승2패 전적으로 강적 두산 베어스를 꺾고 우승 깃발을 든 25일 밤, 프런트와 코치진이 뛰어나가 경기를 치른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에서 김 구단주는 이동욱 감독 뒤에 섰다. 몸집이 작은 데다 모자와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중계방송을 하는 쪽도 그가 구단주인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이번 한국시리즈 1차전부터 6차전까지 경기장을 찾아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응원했는데, 부담을 줄 수 있다며 선수들 앞에는 한번도 나서지 않았다.

우승 세리모니로 집행검이 등장할 때 검을 덮고 있던 천을 끌어내린 건 김 구단주였다. 하지만 중계방송 진행자까지도 그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스태프라고 일축했다. 천을 끌어내린 뒤 바로 화면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구단주로서의 우승 소감도 “만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한마디 하는 것으로 끝냈다.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은 게 사실상 유일하게 앞에 나선 행보였다.

엔씨 쪽은 “구단주는 늘 선수와 코치진 뒤에서 뭘 도와줄지를 고민하는 자세를 가졌다. 늘 선수들과 2보 정도 거리를 두고 뒤에 섰다. 당연히 우승 영광도 선수들이 가져야 하고, 구단주는 선수들이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단주이기에 앞서 야구 덕후이자 엔씨 팬의 자세로 선수들을 리스펙트(존중)하는 자세를 가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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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진(왼쪽) 엔씨다이노스 구단주와 황순현 사장이 2020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맞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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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 선수들은 구단주의 이런 자세 덕에 다른 구단 선수들보다 행복한 선수 생활을 해왔다. 엔씨는 국내 프로야구단 최초로 원정경기 때 선순들에게 1인 1실의 숙소를 제공했다. 숙소에서는 푹 쉴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구단주의 주문에 따라서다. 이전에는 선배와 후배를 묶어 2인 1실로 숙소를 쓰게 했는데, 후배가 빨래와 마사지 등 선배 등쌀에 시달리며 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번 한국시리즈 경기 때는 김 구단주의 뜻에 따라 1.5배의 비용을 들여 선수들을 경기장 근처 최고급 호텔에 묵게 했다.

엔씨 선수들은 또 국내 프로야구 선수로는 처음으로 명함을 소지했다. 김 구단주는 선수들에게 명함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며 “회사에 입사해 명함을 받는 기분은 평생 잊지 못한다. 직업 스포츠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할 수 있다. 선수들을 리스펙트하는 마음으로 명함을 디자인해달라”고 주문했다.

같은 맥락에서 김 구단주는 선수들을 스카웃할 때 실력 못지 않게 인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합 우승의 주역으로 꼽히는 양의지 포수를 영입할 때도 김 구단주는 그라운드에서 다른 선수들을 품어주고 자신감을 실어주는 양 선수의 인성을 주목했다. 회식 자리에서 한 선수가 “양의지 사주세요”라고 하는 말을 듣고 영입 작업을 시작됐지만, 김 구단주가 125억원(4년)을 주고 양의지를 영입하기로 선뜻 결정한 배경에는 양의지의 인성이 있었다. 이번 한국시리즈 6차전서 이기고 있던 경기가 뒤집어질 수 있는 상황으로 몰렸을 때도 양의지가 마운드에 오른 후배 투수에게 “내가 다 막아줄테니 마음껏 던지라”고 격려해 위기를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구단주는 한국시리즈 우승 다음 날 트로피를 들고 어린 적 만화를 보며 야구에 빠진 뒤 영웅으로 꼽아 따라하기를 했던 고 최동원 롯데자이언츠 투수 묘소를 참배해, 진정 야구 팬이자 최동원 투수 덕후의 자세를 보여줬다. 앞서 그는 최동원 선수 장례 때도 조문했다. 최동원기념사업회 쪽에 따르면, 김 구단주는 참배를 하며 “우승 트로피를 보여 드리고 싶어 방문했다. 어릴 때 최동원 선수의 광팬이었고, 1984년 롯데가 우승할 때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하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언젠가 꼭 트로피를 최동원 선수와 함께 들고 싶었다”는 소회를 밝혔다.

김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그는 2011년 엔씨다이노스 창단 기자회견 때 “초등학교 시절 만화 ‘거인의 별’을 보며 야구를 좋아하게 됐고, 중학교 때는 빠른 볼을 잘 던지려고 팔과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도 했다. 커브볼 책을 구해 본 뒤 몇 달간 밤새 담벼락에서 혼자 피칭 연습을 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변화구 전문 투수 노릇도 했다. 변화구를 잘 던지는 롯데자이언츠 최동원 투수가 어릴 적 영웅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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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진 엔씨다이노스 구단주 겸 엔씨소프트 대표가 26일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고 어릴 적부터 영웅으로 꼽아 따라하기를 했던 고 최동원 롯데자이언츠 선수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최동원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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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게임사업을 할 때도 개발자들을 앞세운다. 엔씨소프트의 게임 개발조직(캠프)은 병렬형으로 돼 있다. 각 캠프장들에게 게임 개발 권한과 책임을 주고, 성공 시 영광도 가져가게 한다. 지난해 모바일게임 ‘리니지M’으로 대박을 쳤을 때도 전례없는 성과급을 지급했다. 그는 지금도 리니지 게임 성공을 얘기할 때 당시 개발을 이끌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앞세운다.

이른바 아이티(IT)·게임 분야의 ‘성공한 창업자’ 가운데 그가 유일하게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김정주 넥슨 창업자는 엔엑스씨(넥슨 지주회사) 대표,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글로벌투자책임자(GIO),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와 방준혁 넷마블 창업자는 각각 이사회 의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비켜서 있다. 엔씨소프트는 “대표이사는 책임져야 할 일이 많다. 창업자로써, 대주주로써 권한을 누리는만큼 대표이사가 져야 할 책임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개발자를 앞세우는 것 자체가 (부작용 등에 대한) 책임을 피하는 것이고, 다른 창업자들이 지주회사를 만들어 물러난 것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후임들에게 대표자리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한 게임업체 임원은 “엔씨 다이노스 우승과 집행검 세리모니로 그동안 비주류 취급을 받던 게임산업이 주류 대열에 들었고, 김택진 대표가 주류 기업가 반열에 든 것을 주목한다”고 말했다.

김재섭 선임기자 j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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