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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금)

이슈 미술의 세계

동물에게도 향하는 비장애중심주의 폭력성 [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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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짐을 끄는 짐승들
수나우라 테일러 지음
이마즈 유리 옮김
오월의봄 | 424쪽 | 2만2000원

장애인을 포함해 열악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할 때 흔히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개·돼지도 이렇게는 안 산다”. 그러면 동물권운동하는 사람들이 반문할 것이다. “짐승은 그렇게 살아도 됩니까.”

동물권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지적장애인처럼 이성을 결여한 이들에게 권리가 있다면 동물이 권리를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럼 장애인들은 당연히 반발할 것이다. “어떻게 사람을 동물과 비교합니까.”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비장애인들은 항상 장애인을 동물에 비유했다. 아니 비유하는 것을 넘어서 동물처럼 취급했다. 그렇기에 “장애운동은 언제나 동물과 거리를 두는 방식, 즉 장애인의 인간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곤 했다”.

동물권운동은 그 반대에 있다. 동물과 인간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있다. 다를 것이 없기에 동물과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특징, 즉 인간성이 강화되면 될수록 동물권운동은 설 자리가 좁아진다. 동물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다는 방향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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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클락 하월의 책 <초기 인류>에 처음 등장한 삽화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는 길’(위 사진). 장애운동가 안나 스토눔은 이 유명한 그림을 변형해 ‘적응하든지 죽든지’(아래 사진)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오른쪽 끝에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국제 장애인 접근성 표지가 자리했다. 오월의봄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의 장애운동가이자 동물운동가인 수나우라 테일러가 쓴 <짐을 끄는 짐승들>(Beasts of Burden:Animal and Disability Liberation)은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장애해방’과 ‘동물해방’ 사이에 다리를 놓는 책이다. 비장애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출발해 꾸준한 사유로 동물의 권리까지 나아간다. 비장애중심주의는 장애가 없는 ‘비장애 신체성(abled-bodiedness)’을 ‘정상’과 ‘표준’의 몸으로 제시하며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다른 몸들을 배제하고 억압한다. 비장애중심주의에 대한 기존 비판이 억압받는 몸들을 ‘인간의 몸’으로만 상정한 반면, 이 책은 여기에 ‘동물의 몸’을 추가한다.

태어날 때부터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테일러에게 몸이란 언제나 탐구의 대상이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몸을 ‘미군이 무단 폐기한 여러 독성물질이 상호작용해 만들어낸 혼합물’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독성물질에 오염된 수돗물을 모르고 마셨고, 그 영향으로 그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는 몸을 비정상화하고,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비장애중심주의가 팽배한 환경 속에서 테일러는 사는 내내 자신의 몸이 똑바르지 않으며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했다.

장애에 대한 인식이 태생적이었다면, 동물에 대한 깨달음은 외부에서 찾아왔다. 어린시절 고속도로에서 본 ‘닭을 실은 트럭’이 시작이었다. 닭을 층층이 쌓아 싣고 가는 거대한 트럭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테일러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았다. 트럭 안에서 닭들은 점점 녹초가 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악취가 났고, 테일러는 숨을 참았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이후 미술을 전공한 테일러는 어릴 때 본 트럭 안에 실린 닭 수십 마리를 그리면서 동물을 이용하는 산업과 공장식 축산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리고 그 트럭 안의 닭들이 사실상 모두 ‘장애’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축화된 동물들’에게 장애는 흔하다. 몸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많은 젖을 생산하도록 품종이 ‘개량’된 젖소,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할 만큼 살찌운 돼지, 마취 없이 부리를 절단당한 오리 등. 이성과 언어 같은 인간중심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비장애중심주의’는 장애인에게나 동물에게나 매한가지로 작용한다. 테일러는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동물산업 곳곳에 장애를 가진 몸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또한 동물의 몸이 오늘날 미국에서 장애를 가진 몸과 마음이 억압당하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동물을 둘러싼 억압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 길 역시 그렇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읽기 수월한 책은 아니다. 장애학과 동물권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몇 쪽을 넘기기도 어렵다.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이 맞닿을 수 있다는 전체 논지는 막연히 짐작되지만 하나하나 뜯어가면서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한가지는 확실히 보장할 수 있다. 이 책을 이해하고 제대로 읽어낸다면 장애와 동물에 대한 사유가 지금보다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

한국어판 번역은 현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일본인 이마즈 유리가 맡았다. 이마즈 유리는 이 책을 노들장애학궁리소에 소개하고, 함께 세미나를 한 인연으로 번역까지 맡았다. 이마즈 유리는 ‘옮긴이 후기’에서 “출간되자마자 책을 구해 단숨에 읽고서는 이 책을 읽는 기쁨을 다른 누군가와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며 “이 선물 같은 책을 세상에 내보낼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다”고 말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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