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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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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일까 레퍼런스일까… 에스파 <블랙맘바> 뮤비 논란, 현직 뮤비 감독에게 물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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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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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엔터테인먼트 신인 걸그룹 에스파의 데뷔곡 ‘블랙 맘바’ 뮤직비디오가 최근 표절 논란에 휘말렸다. 지하철 바닥에 꽃밭이 깔리거나 뱀이 움직이는 장면(오른쪽)이 독일의 비주얼 아티스트 티모 헬거트의 작품(왼쪽)과 유사하다는 누리꾼들의 지적이 제기되면서다. 블랙맘바 뮤직비디오·티모 헬거트 인스타그램(@vacades)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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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이냐 레퍼런스냐. 잊을 만 하면 반복되는 것이 엔터테인먼트 업계 표절 논란이지만, 최근에는 그 양상이 달라졌다. 음악이 아니라 뮤직비디오나 콘셉트 사진같은 시각 콘텐츠가 표절 논란에 더 자주 휘말린다. 엔터계 현직자와 전문가들은 “대중문화 콘텐츠의 짧은 수명과 레퍼런스에 의존하는 창작 관행이 표절 논란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직자가 본 표절 논란

최근 가장 논란이 된 사례는 SM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걸그룹 에스파의 데뷔곡 ‘블랙 맘바’ 뮤직비디오다. 지하철 바닥에 꽃밭이 깔리거나 뱀이 움직이는 장면은 독일의 비주얼 아티스트 티모 헬거트의 작품을, 네온 컬러에 이빨을 드러낸 괴물 형상 등은 걸그룹 K/DA의 ‘팝 스타’ 뮤비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나왔다. 누리꾼들은 “한 두 군데만 비슷한 것이 아니다” “대놓고 베낀 것”이라고 비판했다.

SM엔터테인먼트는 별다른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원작자인 헬거트는 지난 16일 인스타그램에 “그들은 나에게 작품에 대한 사용 여부를 묻지 않았고 나는 이 작품을 작업한 적이 없다. 내 작품을 카피한 것으로 보인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가 25일 “에스파의 뮤직비디오 감독이 나에게 연락을 해왔고 우리는 서로의 창조적인 과정을 이해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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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비주얼 아티스트 티모 헬거트는 최근 자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에스파의 신곡 ‘블랙맘바’ 뮤직비디오의 일부 장면이 자신의 작품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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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의혹이 제기된 에스파의 ‘블랙맘바’ 뮤직비디오(왼쪽)와 케이디에이(K/DA)의 ‘팝스타’ 뮤직비디오(오른쪽) 장면들. 팝스파·블랙맘바 뮤직비디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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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뮤직비디오의 표절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걸그룹 스테이씨의 경우 데뷔곡 ‘소 배드’ 뮤비 일부 장면이 미국 팝가수 마일리 사이러스의 ‘미드나잇 스카이’와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후 제작사는 “철저한 사전조사 없이 진행한 부분에 대해 많은 팬들과 대중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방탄소년단, 에이핑크, 트와이스 등도 현대미술 작품을 표절했다는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현직자들은 이런 논란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법적으로든 관행적으로든, 두 장면이 비슷하다고 해서 모두 ‘표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영화, 드라마, 유튜브 등 비디오 콘텐츠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무엇이 ‘원작’인지에 대한 개념은 모호해지고 있다. 하지만 레퍼런스라는 이름 아래 타인의 창작물을 살짝만 변형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는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6년차 뮤직비디오 미술감독 ㄱ씨는 “에스파 뮤직비디오는 ‘솔직히 많이 비슷하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하철에 꽃밭이 펼쳐진 구도 등은 원작이 너무 명확하게 연상된다”면서도 “표절과 레퍼런스의 경계가 애매하다. ‘비슷하지만 다르게 예쁘다’는 느낌이 들면 레퍼런스고 그렇지 않으면 표절”이라고 말했다. 아이돌 뮤비 작업 경험이 있는 연출감독 ㄴ씨도 “대중예술의 평가는 대중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적 표절 여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며 “창작자로서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대중의 평가보다 가혹한 처벌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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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팝가수 마일리 사이러스의 신곡 ‘미드나잇 스카이’ 뮤직비디오 일부 장면(위)과 걸그룹 스테이씨의 신곡 ‘소 배드’의 뮤직비디오 일부 장면(아래). 미드나잇 스카이·소배드 뮤직비디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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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에 의존하는 이유

엔터계의 표절 논란이 반복되는 배경엔 일종의 ‘집단 창작’ 시스템이 있다. 회사마다 다르긴 하지만, 보통은 소속사가 먼저 곡 이미지에 맞는 컨셉을 정한다. 아트 디렉터는 컨셉을 구현할 ‘아트 플랜’을 수립하고, 이해를 돕기 위한 레퍼런스 이미지를 찾아 제공한다. 뮤직비디오 연출, 의상, 조명, 세트 디자인 담당자들도 이런 이미지를 참고해 작업물의 통일성을 유지한다.

문제는 이런 ‘레퍼런스’ 이미지들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ㄴ씨는 “알고리즘이 노출하는 소위 ‘트렌디’한 이미지는 거기서 거기”라며 “나뿐 아니라 남들도 다 보기 때문에 참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부러 레퍼런스를 참고하지 않는다는 그는 “컨셉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요즘 예쁜 것 없나’ 하고 레퍼런스부터 찾는 건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했다.

제작 시간 부족도 창작자들이 레퍼런스에 의존하게 되는 원인이다. ㄴ씨는 “한달 동안 충분히 곡을 음미하고 이끌어낸 컨셉과 일주일만에 뚝딱 만들어낸 것의 독창성은 비교하기 어렵다”며 “대중문화의 순환속도가 빨라지면서 뮤직비디오의 제작기간도 그만큼 짧아지고 있다. 감독들의 레퍼런스 의존도도 높아질 수 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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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보드는 영상의 흐름을 보여주는 기획서 격의 문서다. 과거에는 직접 그림을 그려 스토리보드를 만들었지만, 수년전부터는 아예 레퍼런스 영상을 이어붙인 PPT나 PDF 파일을 만들기도 한다. 사진은 영화 <기생충> 스토리보드로 기사 내용과는 무관하다. CJ E&M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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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직접 그림을 그려 스토리보드를 만들었지만, 수년전부터는 아예 레퍼런스 영상을 이어붙인 PPT나 PDF 파일을 만들기도 한다. 영상의 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조명을 비춰달라’ ‘이런 모양의 세트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하는 식이다.

손영모 국민대 영상디자인학과 교수는 “예전에는 뮤직비디오도 예술의 한 분야였다고 생각하지만, 음반에서 음원 시대로 이행하면서 곡 하나에 딸려오는 소비재의 느낌이 강해졌다”며 “엔터테인먼트 디자인에서 ‘오리지널리티’가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장기적으로는 업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슷한 장면을 모두 ‘표절’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창작자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언론·출판업계 아트디렉터 ㄷ씨는 “창작자 입장에서 표절은 ‘도덕적 낙인’에 가깝다. 초년 디자이너들은 표절 의혹에 심리적으로 굉장히 위축되곤 한다”며 “레퍼런스를 모두 표절로 몰아가는 것은 창작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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