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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단독] ‘비대면 금융의 함정’ 노후자금 1억 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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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들, 모친 명의로 카뱅 개설

수천만원 대출에 예금 빼돌려

세계일보

최모(73)씨와 아내 박모(64)씨 부부는 은행 정기예금에 넣어뒀던 약 1억3000만원을 사실상 ‘도둑’맞았다. 평생에 걸쳐 모은 노후자금이었는데 잃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개설된 신용카드로 각종 대출이 실행됐고 휴대전화도 2대가 개통됐다. 그로 인한 빚이 4000만원에 육박하는 상황이다. 모두 40년 가까이 ‘아들’로 돌본 최모(40)씨 짓이었다. 그의 범행은 허술한 본인인증만으로도 쉽게 뚫리는 비대면 금융거래 시스템이 있어 가능했다.

부부는 1980년 12월 미성년자 미혼모가 낳은 최씨를 데려와 이름을 지어주고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했다. 최씨는 부부의 기대와 달리 각종 범죄로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드나들고 금융채무불이행자로 전락했다. 결국 부부는 2018년 9월 교도소에 수감된 최씨를 상대로 친생자 관계 부존재확인 소송을 내 승소 판결을 받았다. 최씨와 법적으로 완전한 남이 된 것이다.

법적으로 남이었음에도 부부는 최씨가 지난해 4월 출소하자 그의 생활이 염려돼 박씨 명의의 휴대전화를 개통해주고 잔고가 0원인 신협 통장과 직불카드도 만들어줬다. 하지만 최씨는 또다시 부부의 기대를 저버리고 오히려 재산을 가로챌 구상을 했다. 그는 우선 박씨 명의 휴대전화로 카카오뱅크 계좌를 개설했다. 비대면 본인인증에는 “법원에 서류를 제출하려면 필요하다”고 속여 박씨한테서 받아낸 주민등록증을 이용했다. 카카오뱅크의 ‘오픈뱅킹’ 기능으로 박씨의 금융거래 현황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최씨는 박씨 소유 국민카드로 두 차례에 걸쳐 총 600만원을 대출했다.

받은 대출금은 카카오뱅크를 거쳐 신협 계좌로 빼돌렸다. 또 롯데캐피탈에서 받은 대출금 1000만원도 같은 수법으로 가로챘다. 모든 게 비대면으로 이뤄지니 박씨 명의 신용카드를 재발급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거나 각종 결제를 한 대금이 약 900만원에 이른다.

최씨는 같은 수법으로 옛 아버지 명의를 도용해 각종 대출을 받았다. 또 LG유플러스와 KT 대리점에서 휴대전화도 개통했는데, 이때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있다”고 핑계를 댔다고 한다. 최씨를 친자식처럼 대했던 부부에게 돌아온 것은 약 3840만원의 빚더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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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최씨는 옛 아버지 명의 정기예금에 들어있던 노후자금 약 1억3000만원마저 카카오뱅크를 이용해 빼돌렸다. 최씨의 모든 명의도용 금융거래에서 카카오뱅크 계좌가 자금 흐름의 ‘저수지’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부부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지난 7월 최씨를 사문서위조 및 동행사 등 혐의로 부산 영도경찰서에 고소했다. 경찰은 현재 도주한 최씨를 쫓고 있다. 부부는 비대면 본인인증이 허술해 금전적 피해를 겪게 됐다고 보고 각 금융기관과 휴대전화 대리점 등을 상대로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부산지법에 냈다.

부부 측은 “금융기관들은 각자 보유하고 있는 본인인증 관련 매뉴얼과 전산 자료를 제출하고 설명하겠지만, 거기에 분명 허점이 있었으니 최씨의 금융거래가 가능했을 것”이라며 “최씨에게 주민등록증을 잠시 맡겼다는 사정만으로 금융기관들의 책임이 면제 또는 경감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배민영 기자 goodpoin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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