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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금)

이슈 미술의 세계

눈코입 생략한 `얼굴 문패`에…사람들 `앗 나네`하고 꽂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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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서울 문래동에서 7년째 `얼굴 문패`를 만드는 김순미 작가. 눈·코·입이 없는 얼굴 문패를 최근 672번까지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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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혼자 논 거죠, 하하."

경북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생 영어를 가르쳤던 김순미 작가(56)는 2014년 서울 문래동에 터를 잡았다. 철공소 굉음 너머 산화된 기름내가 골목에 혈관처럼 흐르는 지붕 낮은 한 칸 점포였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 "나이 오십에 내 공간을 하나 갖고 싶다. 한 달 실컷 놀고 30만원, 아까울 것 없다"는 마음이었다.

목공 일을 배워 목공방 '문래숲'을 열었다. '이사 떡'을 돌리듯 문래동 사장님들에게 선물하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7년. 문래예술창작촌에서 그의 이름 석 자와 '얼굴 문패'를 모르면 문래동 사람이 아니다. 현대제철은 그의 작품을 거금에 사들였다. 김 작가를 최근 문래숲에서 만나 '눈·코·입 없는 얼굴 문패'의 의미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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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미 작가가 사용 중인 스크롤소(saw, 왼쪽)와 밴드소. 그가 가장 아끼는 '공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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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문패의 정체성은 눈·코·입 없는 얼굴이겠죠. 눈·코·입은 주어지는 신체잖아요. 사람 성격은 안경, 수염, 헤어스타일, 옷차림에서 나오는데 얼굴만 비워 두고 상상하게 만드는 게 재미있어요."

책상에 한 부부의 전신 드로잉이 눈에 띄었다. 밴드소(saw), 스크롤소로 나무를 절단하기 전에 하는 작업인 연필 드로잉이 책상에서 한창이다.

"푸른색 계열 셔츠에 감색 정장을 손에 든 남편과 롱치마에 연분홍 구두를 신은 아내예요. 한 다리 건너 지인들인데 건넬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설레요. 곧 700번째 작품을 돌파할 텐데 목표는 1만명입니다. 얼굴로 쓰는 만인보예요."

50명을 한 번에 담은 작품 '이번엔 네 차례야'는 쿠알라룸푸르 여행 중에 영감을 받았다. 어스름이 지는 저녁노을, 관광버스에서 내린 여행객들이 한 왕궁 앞에서 기념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어둠이 짙어지자 국적 다른 사람들이 너도나도 휴대전화로 플래시를 터뜨려 돌려가며 피사체를 비췄다. 그 모습을 담았다. "스마트폰이라는 초개인적 물성으로 화합이라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연출했으니까요. 손에 쥔 스마트폰에 전기를 넣었죠. 반딧불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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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네 차례야'의 모습. 말레이시아 여행 중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비추는 관광객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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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작가의 얼굴 문패는 수요가 꾸준하다. 현대제철 1층 카페에는 50여 명의 얼굴을 그린 대작 '밥 한번 먹자'가 내걸렸고 망원동 시스터칼국수, 공주시 카페 루치아의뜰도 그의 전시장이다. 충남 당진 아미미술관 등에서 개인전도 열었지만 실생활 공간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다.

"실생활 공간에서 어려움 없이 즐기는 미술도 소중하니까요. 얼굴을 문패로 내건다는 건 인생을 전시하는 것과 같아요. 제가 보여주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지금 모습이에요."

김 작가는 공간을 먼저 만든 뒤 작업에 뛰어들었다. 순서가 바뀐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공간을 확보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는 뭘까. 김 작가는 "심심한 걸 못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을 살아보니 저질러야 일이 되더라"며 "두 번 생각하면 못하는 일이 있다. 한 번 생각날 때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통 100회 단위로 전시회를 열었다는 김 작가가 '1만번째 문패'를 만들면 어떤 전시를 할까. 그는 "자신의 얼굴 문패를 들고 한자리에 모이는 모습을 상상한다"고 말했다. "소중했던 한때가 담긴 문패를 모두가 들고 모이는 거예요. 사실 작업 속도를 고려하면 1만개를 다 만들지는 못할 거예요. 하지만 언제는 계획이 있었나요? 저질러야 일이 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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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래동에 비밀처럼 숨겨진 작업실 `문래숲`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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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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