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다석학회 회장. 강성만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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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이가 많아요.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여든일곱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다 마쳐야겠다고 생각해 애를 써 결판을 냈어요.”
정양모 다석학회 회장은 최근 다석 유영모(1890~1981) 선생이 남긴 유일한 저술인 <다석일지> 번역을 끝내고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원문을 알기 쉽게 윤문하고 풀이를 달았다. “책은 빨라야 1년 뒤에나 나올 겁니다. 번역 원고가 200자 원고지로 만장이 넘어요.”
천주교 사제인 그는 2005년 다석학회를 만들어 지금껏 매주 한 차례 회원들과 다석일지 공부를 하고 있다. “15년 했는데 진도가 3분의 1도 나가지 않았어요. 다 마치려면 앞으로 20년은 더 걸릴 것 같아 제가 앞서 다 풀이하고 박영호 고문 등 세 회원의 감수를 받았어요.” 지난 21일 그가 머무는 경기 용인시 수지구의 한 빌라를 찾았다.
“지금껏 다석 관련 책이 40여권, 박사 논문도 10편이나 나왔어요. 하지만 다석의 가장 중요한 자료인 다석일지 번역이 제대로 안 된 상태라 안타까운 마음이 컸어요.”
다석은 65살 되던 1955년에 일 년 뒤 죽을 것이라고 자신의 사망 예정일을 선포하고 이때부터 일지를 썼다. 이 기록은 74년까지 이어졌다. 일지 영인본은 다석 사후 1년 뒤 나왔고 다석의 제자인 고 김흥호 선생은 2001년에 일지를 모두 7권 분량으로 풀이한 <다석일지 공부>(솔)를 냈다. “김흥호 목사님은 다석학회 1대 고문이셨죠. 다석 연구의 선각자이셨어요. 하지만 그분은 다석의 독특한 한글 시조를 현대말로 옮기지 않고 풀이만 하셨어요. 또 다석을 너무 사랑하셔서, 풀이를 보면 어디가 다석 사상이고 어디가 김흥호 사상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아요.”
다석 유영모. <한겨레> 자료사진 |
그는 이번 번역에서 다석이 남긴 한글 시조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일지에 한글 시조 2500수, 한시 2천 수가 있어요. 한시는 제가 다룰 능력도 없고 해서 후학의 숙제로 남겨 두었어요.”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은 서양 종교인 기독교 사상을 동양의 유·불·선과 하나로 묶어 사유한 20세기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다. 서울 와이엠시에이 연경반에서 1928년부터 무려 35년 동안 성경과 동양고전을 강의했다.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는 다석이 기틀을 잡고 함석헌이 정립한 씨알사상을 한국의 대표적인 근현대사상으로 조명하기도 했다. 다석에게 씨알(백성)은 ‘온갖 변화가 가능한 씨를 품은 상태’였다. 그는 우리말 철학의 선구자로도 불린다. 소리글자인 한글에서 뜻을 찾고, 잊힌 순우리말을 되살리는 노력을 쉼 없이 했다. 다석일지가 이해는커녕 읽기조차 어려운 이유이다. “다석의 우리말 시조를 읽고 윤문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다석은 세종대왕이 만든 스물여덟자 말고도 다른 글자를 만들어 썼어요. 신조어도 자꾸 만들었죠. 한글 받침이 네개나 되는 글자도 있어요. 선생의 원문을 컴퓨터에 옮기는 것부터가 퍽 어려웠어요.”
번역으로 다석 사상을 새롭게 이해한 게 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다석 제자들 사이에 다석을 정통 기독교인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기독교를 넘어선 분으로 볼 것이냐 이견이 있어요. 제가 일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니, 다석은 예수와 기독교를 넘어서는 분이었어요. 다석은 예수를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받들었어요. 하지만 예수 하나만 믿지 않았어요. 예수의 신성도 인정하지 않았고요. 그런 의미로 참기독교인이 아니었죠. 다석은 예수와 석가, 노자, 장자의 경계선 없이 자유롭게 동서고전을 공부한 분이죠. ‘내가 성경만 먹고 어떻게 사느냐, 그러면 배고프고 허기지다. 불교와 노장에서도 주워 먹겠다’고 했어요. 다석은 기성교회를 배척한 무교회주의자들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어요. 모임에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을 외운다고요.”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성서 신학자다. 프랑스 리옹가톨릭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1970년 독일 뷔르츠부르크대에서 신약 연구로 박사 학위를 땄다. 박사 논문은 ‘소외자를 편애한 예수’를 주제로 다뤘다. 71년부터 30년 동안 광주 가톨릭대와 서강대, 성공회대에서 성서학을 가르쳤다. 장남인 그를 포함해 오형제 중 삼형제가 가톨릭 사제다. “고향인 경북 상주 본당에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를 나온 김요셉 신부님이 계셨어요. 그 시절에는 전국에 한국인 신부가 10명도 안 됐어요. 신부님이 강론 때마다 ‘사내애를 둘 낳으면 하나, 셋 낳으면 둘, 다섯이면 셋을 신학교에 보내라고 강조하셨어요. 어머니가 그 말씀을 명심하고 오형제 중 셋을 신학교에 보냈죠. 모친은 아주 총명한 어른이셨어요. 제가 아무것도 모를 때 은근히 그(신학교 입학) 쪽으로 몰았어요.” 그는 만 13살에 신학교 예비 교육을 하는 서울 용산의 옛 성신중에 들어갔다.
가톨릭 사제이자 성서 신학자
학회 꾸려 15년 ‘다석일지’ 공부
‘씨알사상’ 함석헌 스승 ‘유일 저술’
일지 한글시조 2500수 번역 탈고
“한국인도 다석 시 위대함 잘 몰라
교회서 예수와 사람으로 중심 옮겨야”
그는 다석 제자인 고 유달영 선생의 서재에서 ‘다석’과 처음 만났다. 다석 사후 9년인 1990년이었다. “유 선생이 이끄는 재단의 서양 고전 강의를 구상 시인 추천으로 제가 맡게 되었어요. 강의를 하다 시간이 남아 유 선생 서재를 찾았는데 다석 책이 있더군요. 다석이 어떤 분이냐고 묻자 유 선생이 복본인 다석 관련 책 한 권을 주었죠.” 말을 이었다. “책을 보니 서당에서 잔뼈가 굵은 유생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데 참 뜻밖이었어요. 사실 제가 프랑스와 독일, 예루살렘에서 서양 스승에게 성경을 배우며 어딘가 나한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동양식으로 성경을 풀이한 책을 보지 못해 늘 안타깝고 외로웠어요.” 그는 “제가 아마 정통 보수 기독교인이었다면 요즘 말로 종교 다원론자인 다석을 버렸을 것”이라고 했다. “리옹가톨릭대 스승님들이 진취적이고 개방적이었어요. 저도 그 영향으로 진취적인 생각을 했어요.”
가톨릭 사제인 그에게 사상가 다석은 어떤 존재일까? “시인이죠. 강의할 때는 줄줄 이야기하셨지만 친필로 남긴 글은 대부분 시조와 한시입니다. 권력과 금력, 명예, 성생활과도 거리가 멀고 평생 시를 쓰셨죠. 초월 시인, 종교 시인이죠. 초월시로 세계를 감동시킨 분이 더러 있어요.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1207~1273)는 4만수 이상의 초월시를 남겼어요. 이슬람교 신자인데 제자들과 춤추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시로 썼죠. 춤추는 신비주의자였죠. 인도 시인 타고르(1861~1941)가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집 <기탄잘리>도 널리 알려진 종교시입니다. 시집에 있는 시 103수 가운데 앞은 세상 사는 이야기, 뒤는 하느님 섬기는 이야기입니다. 다석 시도 이 사람들 경지와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국인들조차 다석 시를 잘 몰라요. 위대한 초월시인데 아직 우리말로도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어요. 제자들이 너무 못난 탓이죠.”
그는 다석이 제자들에게 암탉이라고 불린 사연도 들려줬다. “선생님은 새벽 세시에 일어나 맨손체조를 하고 네시면 명상을 했어요. 혼자 골똘히 생각해 머릿속에서 뭔가 정리되면 일지에 시조 한 수씩 적었어요. 어떤 날은 다섯 수가 쏟아지기도 했어요.”
그에게 가장 감동적인 다석의 글은 “다석이 52세 때 문득 인생에 대해 깨닫고 쓴 시편들”이다. “그때 하느님을 깨달은 거죠. 그리고 시가 한량없이 술술 나왔어요. 그 시들을 보면서 엄청난 체험이 뒤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석은 이때 쓴 시 ‘허물은 죽은 살이다’ 말미에서 이렇게 외친다. “주여, 이 꺼풀 벗겨 줍소서/ 이 허물 떼여 줍소서./ 저는 삶이 그립삽나이다/ 몸을 잊자!/ 낯을 벗자!/ 맘을 비히자!/ 그리고/ 보내신/ 이의 뜻을 품자!/ 주를 따러,/ 아버지의 말슴을 일우자!/ 말슴을 일움으로/ 살자! 아멘.”
정양모 다석학회 회장. 강성만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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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여년 전에 한국 가톨릭의 권위주의를 지적하는 책을 서공석 신부와 함께 펴내기도 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닮기’와 ‘예수 공부’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을 보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인연 맺은 사람들이죠. 그리스도인의 이런 정체성을 확립하려면 예수 공부와 예수 닮기가 가장 중요해요. 교리나 제도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교회를 보면 이게 많이 부족해요. 정교회나 가톨릭, 개신교 다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이름값을 못 해요. 사회에 기여 못 한다고 오히려 지탄을 받아요. 전광훈 목사가 대표적이죠. 그 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많이 코로나에 걸렸는데 예수 사랑을 제일로 여긴다면 그런 일이 있을까요. 예수 사랑과 정반대되는 현상이죠. 지금 각 교파는 예수 공부 대신 교리나 제도로 싸워요. 성직자 권위주의도 많이 고쳐야 합니다. 교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와 사람이 중요해요. 중심을 예수와 사람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가 속한 가톨릭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가 깊고 규모가 클수록 기동력이 떨어져요. 2천년 역사에 신자가 13억인 로마 가톨릭이 그래요. 2천년 동안 성경을 기반으로 제도와 교리가 정해졌어요. 이 둘만 해도 얼마나 딱딱합니까. 제도는 어느 시대의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지금 이것을 뜯어고치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교리도 금과옥조가 아닙니다. 현상에 만족할 수 없어요.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남녀동등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겁니다. 교황이 되신 뒤 연구위를 만들어, 여자 사제도 아니고 여자 부제가 가능한지 검토하라고 지시했어요. 꽤 오래전입니다. 하지만 꿈쩍도 안 해요. 2천년 동안 남자들만 성직자 행세를 했어요. 여자 사제는 한 번도 없었죠.” 그는 교황청에만 성직자·신학자 1천 명이 있다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개혁 의지를 보이더라도 그들을 설득해 실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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