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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노회찬의 ‘6411 정신’은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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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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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0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열린 노회찬 전 의원 1주기 추모제에 ‘6411 버스’ 모형물이 놓여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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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회찬 전 의원은 ‘진보정치의 상징’이었다. 민주노동당부터 정의당까지 진보정치의 험한 노선을 걸었다. 그의 진보는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2012년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연설에 녹아 있다.

“그 누구도 새벽 4시와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가 출발점부터 거의 만석이 되어서 강남의 여러 정류장에서 50·60대 아주머니들을 다 내려준 후에 종점으로 향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었습니까?”

2018년 9월 9일 그와 뜻을 함께했던 각계 인사 18명은 ‘노회찬재단’ 설립을 공식 제안했다. 노 전 의원의 49재 날이었다. 이듬해 1월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이 공식 출범했다. 노 전 의원이 멈춘 곳에서 재단은 발을 뗐다.

6411 정신을 잇다

노회찬재단의 활동은 크게 세가지다. 가장 먼저 추모와 기록화다. 노 전 의원이 노동운동, 진보정당활동, 국회 의정활동을 하면서 남긴 저서, 원고, 연설문, 입법·정책 연구자료, 활동 사진·영상, 유품 등을 시기별·주제별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록들과 주변 인물 인터뷰를 토대로 내년 3주기에는 노회찬 평전이 나온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회찬, 6411>도 제작 중이다. 명필름·영화사 풀과 손을 맞잡았다.

또 하나의 활동은 ‘노회찬 정치학교’다. 제2, 제3의 노회찬을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꼭 정치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사회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시민을 위한 인문강좌도 제공한다. 올가을 2기를 맞은 정치학교는 코로나19로 인해 화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2기의 핵심 주제는 ‘재난시대, 한국사회와 정치를 탐색하다’이다. 위기가 일상화된 시대의 리더십은 어때야 하는지 탐구한다. 중학교 3학년부터 60대까지 수강생 25명의 면면이 다양하다. 화상으로 열리다 보니 수도권 거주자 중심이었던 1기와 달리 전국으로 뻗어 있다. 또 다른 점은 2기 때는 경쟁률이 제법 있었다는 것.

마지막은 노 전 의원이 꿈꾸던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활동이다. 김형탁 사무총장은 ”올해는 6411 버스 정신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주력했다”고 말한다. 민주노동당 부대표, 진보신당 사무총장, 정의당 부대표 등을 거친 김 사무총장은 지난해 11월 사무총장직을 시작했다. “올초 후원회원들에게 재단 미션 수립을 위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했어요. 여성, 젊은 사람일수록 6411번 버스를 가장 많이 기억하더라고요. 나이가 있는 층은 거대 권력에 맞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냈던 ‘X파일’을 떠올리고요. 회원들이 기억하는 노회찬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 사람’으로 집약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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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6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선거대책본부장과 운동원들이 서울 구로갑 지역 거리유세에서 ‘판갈이론’을 상징하는 고기불판을 들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사진 위).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에는 노 전 의원이 쓰던 책상을 비롯해 유품들이 놓여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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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치를 찾아서

6411 정신을 살리려 ‘6411 프로젝트’를 벌였다. 다시 우리 사회의 ‘투명인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청소노동자, 돌봄노동자, 봉제노동자, 핵발전소 하청노동자 등 4개 직종 노동자들이 처한 문제를 심층 인터뷰로 짚어보고 정책을 만들어내고 있다. 김 사무총장은 “이들의 목소리가 정책으로 입안되고 실현되는 것을 우리 재단이 매개하는 프로젝트”라고 했다. 지난 7월에는 프로젝트의 하나로 ‘6411 사회극(역할극 형식으로 집단의 문제를 탐색하고 해결하는 기법)’을 진행했다. 돌봄·청소·봉제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해 일터의 문제와 마주했다. 노동계 활동가·전문가들이 참여하는 ‘6411사회연대포럼’도 창립했다. 김 사무총장은 “예를 들어 스웨덴이 (사회연대 측면에서) 상당히 모범적이라고 얘기하는데, 그 나라가 좋다고 끝날 게 아니라 한국사회에선 어떻게 실현해낼 수 있을 것인가 전략을 세워보자는 것”이라며 “골방, 책상 위 연구가 아닌 진짜 구체적인 실천사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탓에 올해 사업계획이 생각대로 진행되진 않았지만, 6411 정신을 크고 작게 잇고 있다.

노 전 의원은 유서에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썼다. 노회찬재단도 정의당이 잘되기를 바란다. 종종 재단이 정의당 부속기관 아니냐는 오해도 받는다. 하지만 재단은 정부와 특정 정당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전부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후원회원은 7200여명. 사무처 직원 7명이 재단 살림을 도맡고 있다. 서울 공덕동에서 전세살이를 하고 있는데, 3주기 즈음에는 건물을 마련하고자 한다.

후원회원을 받을 때 당적을 묻지 않는다. 정의당 당원이 20% 정도로, 회원 대다수가 일반인이라 추정할 뿐이다. 재단을 만들 때 정치적 사안에 개입하지 않고 재단 본연의 사업에 집중하자는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김 사무총장은 “노회찬의 정치가 정의당 국회의원이었을 때는 정의당 정치였겠지만, 지금은 딱 한계지어지는 건 아니라고 본다”며 “이 사회가 제대로 가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정치가 필요한가, 큰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재단이) 노회찬의 정치가 이런 것입니다,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보자고 사업도 제안하고 네트워킹도 할 수 있겠죠. 정의당과의 관계는 직접적이기보다는 정서적으로 소통하는 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각자 나름대로 ‘노회찬 정치’를 이야기했다면, 앞으로는 틀을 갖춰갈 것이라고 내다본다. “‘노회찬의 정치’가 도대체 뭐냐. 내년 상반기에 다큐멘터리와 평전이 나오면 노회찬 정치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만들어질 것 같아요. 또 아카이빙 작업이 완료되면 연구자들이 다양한 영역, 다양한 관점에서 노회찬의 정치를 해석할 수 있게 될 것이고요. 연구비를 지원하는 공모도 할 생각입니다. 노회찬 정신, 연대의 정신, 함께 비를 맞는 정신이 사회적으로 공감을 얻고 확산할 수 있도록 해나가야죠.”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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