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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신경영 선언 전날, 포크 내던진 사연…현명관의 이건희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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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996년 현명관 당시 삼성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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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취임한 후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질 때까지 27년 동안 7명의 비서실장이 그를 보좌했다.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바꾼 기폭제가 된 '신경영'의 초창기 3년간(1993년 10월~1996년 12월) 이 회장 곁을 지켰다. 현 전 회장은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건희 회장 같은 경영인이 한두 사람만 더 나와도 대한민국 경제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7월 출간한 자서전『위대한 거래』에 이건희 회장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담았다. 현 전 회장의 설명을 바탕으로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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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국가에 헌납했다가 1994년 삼성이 다시 인수한 한국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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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료 인수에 300억 오버슈팅 했지만



1994년 초여름, 한국비료의 민영화를 위한 매각 공고가 떴다. 한국비료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1966년 삼성이 국가에 반강제로 헌납한 회사였다. 당시 현명관 삼성 비서실장은 이를 즉각 이건희 회장에게 보고했다. 이 회장은 “반드시 찾아오라”고 명했다.

당시 현대그룹 계열사인 금강화학과 대림산업도 한국비료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삼성 경영진은 최종 입찰가격을 두고 고심 끝에 2300억원을 제시했고, 결국 인수에 성공했다. 하지만 경쟁사가 써낸 응찰가는 2000억원. 300억원이나 ‘오버 슈팅’을 한 것이다. 현 비서실장은 불호령과 문책을 각오하고 미국 방문 중이던 이건희 회장에게 보고했다. "낙찰받았지만 저희가 실수를 했습니다. 300억원이나 많게 적어 냈습니다." 돌아온 답은 이랬다. "이 사람아, 우리가 시장에서 사고 싶은 물건을 사는데 비싸게 주고 사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신경 쓰지 마세요." 현 전 회장은 "이 회장은 통이 큰 경영자였다"며 "정부 고위 관료들을 만나도 삼성의 현안을 부탁하는 것을 본 적이 없고 한국 경제나 사회 전체의 문제를 논의하곤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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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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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영 선언 하루 전날 포크 집어 던진 사연



1993년 6월 6일, 삼성의 사장단 100여 명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 모였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하루 전날이었다. 호텔 회의장엔 녹음된 이 회장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회장은 자신의 지시가 경영진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왜곡되는 일이 반복되자 직접 녹음을 해서 전달하는 방법을 자주 썼다. "시간이 걸려도 질로 승부해야 합니다. 당장 매출이 줄어도 할 수 없어. 도전해야 해." 그런데 직후, 이수빈 당시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장님, 하지만 양도 중요합니다. 양적 성장을 통해 흑자를 만들고 질로 나아갈 바탕을 만들어야…." 그 순간 회의장엔 '탕!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회장이 테이블에 있던 포크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소리였다. 현 전 회장은 "비서실장은 사장단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신 전달한 것인데 이 회장이 격노했다"며 "당시 사장단조차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회장이 격노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사장단에서도 이 회장의 진심을 알게 됐다"며 "돌아보면, 이 회장은 초일류 삼성을 만들기 위한 외로운 도박을 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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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영빈관이자 이건희 회장이 집무실로 썼던 승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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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지원에서의 항명, 그리고 반전



‘마치 태종이나 세조가 진행하는 공포의 어전회의가 승지원의 기와 아래 재현되는 듯했다.’ ‘이건희 회장의 질문과 계열사 사장의 대답이 오가는 피 튀기는 국문(鞫問) 현장 같았다.’

현명관 전 회장이 묘사한 승지원의 분위기다. 승지원은 이건희 회장의 집무실이자 삼성의 영빈관이다. 삼성의 대소사가 대부분 이곳에서 결정됐다. 이런 곳에서 현 전 회장은 삼성시계 사장 시절, 이건희 회장에게 항명에 가까운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삼성시계는 일본의 초정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세이코와 합작한 회사로, 이 회장이 공을 들이던 '작품'이었다. 현 전 회장은 "세이코가 기술이전도 제대로 안 해주면서 불공정한 거래를 요구한다"며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가 ‘역린’을 건드렸다고 느꼈을 때, 이건희 회장은 “누가 (해결)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 있었어?”라며 현 전 회장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현 전 회장은 “이 회장의 리더십은 기분에 따라 불호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항명처럼 보이는 말도 귀담아듣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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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이건희 삼성 회장(가운데)과 그룹 회장단이 신년 축하 시루떡을 자르고 있다. 왼쪽부터 당시 삼성종합기술원 임관 회장, 삼성라이온즈구단주 현명관 회장, 이건희 회장, 삼성사회봉사단장 이수빈 회장,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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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를 위해서라면 아버지의 사람이라도



현명관 전 회장은 삼성의 신경영이 막 시작됐던 1993년 10월부터 3년간 이건희 회장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삼성 공채도 아닌 관료 출신의 그는 어떻게 삼성의 ‘2인자’가 됐을까. 1993년 가을, 이건희 회장은 당시 현명관 삼성물산 사장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삼성그룹 운영에 있어 고쳐야 할 것이 뭐라 생각합니까?” 현 전 회장의 답은 이랬다. “삼성은 여러 업종이 있는데, 그 특성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경영 방향과 방침을 적용해 오고 있습니다. 소그룹 별로 경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객입니다.”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침묵하던 이 회장이 한마디를 던졌다. “현 사장이 비서실장을 하세요. (조직을) 바꾸는 것은 당신이 잘하잖아.” 현 전 회장은 “이건희 회장은 한 사람을 중책에 앉히기 위해 1년 이상 치밀하게 관찰한다”며 “그 과정에서 아버지 시대의 사람이나, 외부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은 지워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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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이 지난 7월 발간한 자서전 〈위대한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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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되게 질책하되, 권한을 준다



1989년 11월, 당시 현명관 호텔신라 대표(부사장)는 이건희 회장에게 불려가 호된 질책을 받았다. 특급조리사를 포함한 여러 직원이 힐튼호텔로 옮긴 것 때문이었다. 적자를 보던 호텔신라의 재무 상태에 대한 질타도 이어졌다. 현 전 회장은 회사채를 발행하고 호텔을 상장해 자금을 충당하겠다고 보고했다. 이 회장은 “우리나라에 상장한 호텔이 어딨고, 적자 회사의 회사채를 누가 매입하겠느냐”고 질타하면서도 현 전 회장에게 전권을 맡겼다고 한다. 결국 5개월 후 호텔신라는 회사채 발행에 성공하고, 2년 뒤 상장한다. 현 전 회장은 “이 회장은 나를 호되게 질책하면서 동시에 당신이 호텔신라의 책임자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라며 “실제로 그는 일을 추진하는 사람에겐 권한을 주고 일일이 간섭하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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