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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동·서양이 만난 그림…시간을 초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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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Reproduction of time-Gogh Mixed _media on canvas _162.3x130.3cm 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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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화면에서 수직낙하하는 한줄기 폭포수 끝에 바이올린 받침대가 붙어 있을 뿐, 주변이 텅 비어 있다. 그 여백이 자꾸 상상의 여지를 만든다. 어떤 풍경이 있던 자리일까, 왜 폭포수 한 줄기만 남겨 뒀을까···.

서울 노화랑 개인전에서 만난 한만영 작가(74)는 "안견(조선시대 화가)의 사계도 구석에 작게 그려져 있는 폭포만 가져왔다. 풍경에서 폭포가 모든 것을 몰고 온다. 가얄프지만 강하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조용한 울림을 줬다. 굉장히 명상적이고 고요하다"고 말했다.

바이올린 받침대는 서울 낙원동 악기 상가에서 구했다고 한다. 폭포와 바이올린은 무슨 상관 관계일까. 그는 "조형성을 고려했다"고만 설명했지만 조선시대 폭포수와 현대 바이올린의 조합을 통해 과거와 현재, 허상과 실상, 회화와 입체의 경계를 허문다. 과거 그림 일부를 복제하고 현대 물건들을 붙여 시간을 초월하는 그림이 완성된다.

전시장에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 한국 산수화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서양 명화와 현대 오브제들의 독특하고 오묘한 조합이 펼쳐진다.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 그림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속 여인을 향수 뚜껑과 큐빅 등과 함께 공중에 띄워 부유하는 욕망을 그린 대형 화면에서 작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올림피아' 속 누드 여인 옆에는 슈퍼맨 이미지를 붙여 시간차를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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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roduction of time- Frida_Mixed Media on canvas, Object_117x91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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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roduction of time-from An kyon.1 _ Acrylic on canvas , Object _ 145.5x97cm _2020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그림 모자 아래에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로고를 부착했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 초상화를 아주 작게 그려 전선을 붙이고, 반가사유상 아래에는 시계추를 달았다. 미국 배우 마를린 먼로와 조선 화가 신윤복의 '단오풍정' 속 멱 감는 여인을 아래위로 그린 작품은 동서양 여인의 만남이다.

노란 화면에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동전 만하게 그린 이유는 뭘까. 작가는 "공간을 다 채우면 압축이 안된다. 긴장감을 던져주기 위해 작게 그린다. 벽도 제2캔버스"라고 답했다.

그는 만물상처럼 골프티, 와인뚜껑, 시계 태엽, 정수기 세척솔 등 다양한 일상 오브제들을 작품에 부착한다. 서울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구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눈에 띄면 사모은다. 그는 "그림과 오브제를 꼭 연결할 필요는 없다. 의외성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팔레트를 사용하지 않고 화면에 물감을 개어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 제단화 '쾌락의 정원'과 마그리트 그림 일부를 그리기도 한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대담한 조형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기본 조형 논리는 옛날과 같다. 그냥 조금씩 끊임없이 변하는 그림을 그릴 뿐"이라고 겸손함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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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roduction of time-Lady` [사진 제공 = 노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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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roduction of time-Oiympia _Mixed Media on canvas , Object _193.9x1.2x130.3cm _2018


사물과 인물이 부유하는 비현실적인 그림을 그리지만 난해하지 않고 편안하다. 서울 평창동 작업실이 남향이어서 밝은데다가 성품 자체가 어거지로 만든 것을 싫어한다.

섬세하고 정교한 그림 실력을 절제하고 여백을 많이 뒀다는게 이번 전시 특징이다.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빼기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좀 더 간결하게 보고 버릴 것이 더 많아졌다. 핵심을 찾아내 깎고 깎아낸다. 그림이 생략되면서 간단명료해지고 정수를 드러낸다"면서도 "빈 공간이지만 모든게 사라진게 아니다. 정신이나 노스탤지어, 희망 등 여러가지가 있다. 관람객이 생각할 공간을 주는 것이다"고 말했다. 생략하면 그림에 집중력이 더 생겨 빼기의 미학이 완성된다.

추상화 열풍에도 묵묵히 구상화 외길을 걸어온 그는 "내것을 해야지.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고뇌하고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전시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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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roduction of time-Smile _Acrylic on canvas , Object _193.9x260.6cm 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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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영 _Reproduction of time-Bosch.1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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