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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구름 연작 사실주의 작가 강운, 추상화 50점 쏟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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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째 개인전 ‘마음산책’

삶에 대한 회한 적은 글

나무 젓가락으로 적고

다시 붓질해 지우기 되풀이

단색조 화면 만들어


한겨레

전시장에 나온 <마음산책> 연작의 세부. 단색조 추상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작가의 삶에 얽힌 상처와 기억을 털어놓은 글들을 화폭에 적고 다시 색으로 지우고 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독특한 질감과 흔적이 남는 화면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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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 전체를 검정, 하양, 파랑 등의 한 색깔 안료로 벽지처럼 뒤덮어버린다.

이런 형식을 특징으로 삼는 단색조 추상 그림은 현재 국내 미술판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그림 유파다. 흔히 ‘단색화’(모노크롬)로 불리는 이 그림 유파는 1970년대 박서보, 하종현 등 홍익대 출신 모더니즘 작가들을 중심으로 등장한 이래 2010년대 이후 화랑들의 마케팅을 업고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간판이 됐다. 단순한 색면의 화면에 선이나 형상의 이미지가 숱하게 반복되는 ‘단색화’ 작품들을 두고 ‘몰지성적 그림’이란 혹평과 동양철학의 수행 정신을 형상화했다는 호평이 엇갈려왔다.

이런 국내 단색조 회화의 이력과 면모에 비춰 구름작가로 유명한 중견작가 강운(54)씨가 최근 내놓은 단색조의 신작들은 이른바 단색화의 기존 개념과 범주를 새롭게 성찰하게 하는 묘미를 안겨준다. 강 작가는 1990년대 이래 구름의 여러 면모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연작과 이를 변주한 한지 작업을 잇따라 내면서 사실주의 화가로 인식되어왔다. 그런데 신작 전시에서는 뜻밖에도 기존 단색화와 다를 바 없는 외양의 색면 추상화들을 내놓았다.

지금 광주 구성로에 있는 전시공간 김냇과에 차려진 그의 8번째 개인전 ‘마음산책’은 보라, 빨강, 회색 등의 여러 단색들로 뒤덮인 색면 추상화 50점으로 지상·지하 전시장 벽면을 뒤덮었다. 구름 연작을 해오던 작가가 추상 색면으로 작업 흐름을 튼 데 대해 당혹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신작의 화면 세부를 살펴보면, 마냥 무의식적으로 선을 되풀이해 긋거나 색깔로 덮는 기존 단색화의 수행적 스타일과는 상반된 맥락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겨레

강운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공간 김냇과의 출품작 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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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얄붓으로 휘휘 칠한 듯 화면의 단색조 화면 위에 남겨진 ‘바람 자국’ 같은 흔적의 이미지나 우툴두툴 점처럼 솟은 자잘한 물감 덩어리들이 바로 그런 징표들이다. 직관적으로 작가 내면의 여러 상처나 기억을 상기시키는 표식들로 읽힌다. 실제로 출품된 ‘마음산책’ 연작들의 꺼끌거리는 질감과 휘몰아치는 붓질 자국들은 그가 최근 들어 쓰기 시작한 자기 삶에 대한 고백의 글들을 회화적으로 변형시킨 결과물이다. 글들에는 5년 전 사별한 부인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수십년 전 전방에서 군에 복무할 당시 철조망과 바람에 대해 느꼈던 감성적 기억, 5·18 광주항쟁이 남긴 트라우마, 생계와 작품성의 경계 사이를 넘나들어온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 등을 담았다고 한다. 이 글의 텍스트를 바탕색 칠한 화면에 깎은 나무젓가락으로 적고 다시 붓질해 색으로 지우고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질감과 선이 돌출하는 단색조의 화면을 만들었다. 난해한 철학적 사유를 내세운 기존 단색화 작업의 공허한 느낌과 달리 작가의 삶과 기억을 되돌아보면서 마음의 단면을 뽑아낸 정직한 추상 정신이 울림 있게 다가온다. 31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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