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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서 배를 구하지 못한다니요"… 발 동동 구르는 수출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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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는 A씨는 지난 9월부터 수출을 제때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유럽에서 화장품을 보내달라는 주문이 밀려들고 있지만 제품을 실어 보낼 선박을 구할 수 없기 때문. 선적이 한두 달 지연되는 것은 기본이고, 납기를 맞추지 못해 해외 구매처로부터 주문 취소 통보를 받는 일도 많다.

주요 바이어를 잃을까 봐 손해를 감수하고 선박 운임의 10배(4000만원)를 들여 비행기로 제품을 보낸 적도 여러 번이다. A대표는 "화장품을 항공기로 수출했다고 하면 업계에서는 ‘소설 쓴다’고 하겠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며 "코로나 여파를 딛고 드디어 회생하는가 싶었는데, 배를 구하지 못해 또다시 위기를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코로나 불황’을 뚫고 최근 국내 기업의 수출이 늘어나고 있지만 수출 선박이 부족해 국내 수출업체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한진해운 파산 등 정부의 과도한 해운 구조조정으로 가용한 선박 수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최근 미국·유럽행 수출이 급증하자 기업들이 제품을 보낼 선박이 부족해 수출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제품을 보내달라는 구매자가 있는 데도 수출 선박을 구하지 못해 도산 위기를 겪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수출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조선비즈

지난 4월 부산신항 전경. 카고 크레인들이 컨테이너선에 화물을 싣고 있다.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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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운 치킨게임에서 패한 한국… 그 피해는 수출기업이 뒤집어썼다

미국으로 향하는 컨테이너선 운임은 2012년 이후 8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22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상하이컨테이너선운임지수(SCFI)는 지난 16일 1448을 기록했다. 전년도 같은 기간(746)에 비하면 2배가량 오른 셈이다. 일부 선사들은 물건을 싣고 싶으면 웃돈(프리미엄)을 달라고 요구해 결국 3~4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운임이 단기간에 ‘이상 급등’한 원인은 복합적이다. 일단 코로나19 여파로 멈췄던 중국 공장이 잇달아 재가동하면서 수출 물류가 늘어나고 있다. 미국 기업들의 재택근무가 장기화하면서 온라인 쇼핑이 늘었고, 미국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지원금을 풀며 미국으로 향하는 제품이 급격히 늘었다.

이보다 더 큰 이유는 부족한 선박이다. 강도 높은 해운업 구조조정을 실시한 우리나라는 한진해운 파산으로 가용한 선박수와 선복량이 대폭 줄었다. 정부는 HMM(옛 현대상선)의 해운 물량을 확대하기 위해 지원하기 있지만 수출기업의 물량을 원활히 소화하기엔 아직 부족한 상황이다.

해운업계에서 치킨게임이 벌어진 것은 지난 2015년부터다. 당시 현대상선, 한진해운 등은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으로부터 강도 높은 자구안을 요구받고 있었는데, 글로벌 1위 해운사 머스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출혈경쟁을 시작했다. 당시 머스크는 운임을 70%가량 낮췄다. 이로 인해 머스크는 2016년 3억7600만달러(당시 약 4308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는데, 그래도 경쟁자인 한진해운 등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한진해운 파산으로 우리나라는 해운 경쟁력을 잃었다. 2010년만 해도 5위였던 우리나라 운송 서비스 수출 순위는 2019년 10위권 밖으로 밀려났고, 한국 해운사의 아시아~미주노선 선복량은 35만TEU 줄었다. 점유율도 12.2%에서 7%로 하락했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정부는 뒤늦게 HMM에 대규모 자금을 투여하고 있는데, 만약 한진해운을 파산시키지 않고 채권단 관리하에 뒀다면 선박이 모자라 수출을 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HMM은 한국~미국 항로에 선박을 마음껏 늘릴 수 없는 상황이다. HMM은 지난 4월 세계 3대 해운동맹 중 하나인 ‘디얼라이언스’ 정식 회원으로 합류했는데, 디얼라이언스는 독일의 ‘하팍로이드’, 일본의 원(ONE)이 주도하고 있다. 해운동맹의 이윤 구조에 따라 전략적으로 노선을 배치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위주로 노선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

◇ 中·日보다 어려운 처지… "정부가 적극 나서야"

국내 수출기업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경쟁사에 비해 어려운 상황이다. 글로벌 해운사들이 아시아 최대 수출국인 중국에 선박을 집중 투입하면서, 한국을 우선순위에서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북미·유럽으로 가는 수출 선박이 중국에서 이미 만선이 돼 한국을 거치지 않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일본 화주들도 자국 선사와 장기 계약을 맺고 있어 한국 수출업체만큼 타격을 입지 않고 있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적선사와 장기운송계약을 많이 맺는 일본기업들은 북미로 수출하는 40피트 컨테이너 1개 운임을 한국 기업보다 1000달러 정도 낮게 지불하고 있다"고 전했다.

수출업체들은 "다른 국가에 비해 우리 정부가 손놓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말한다. 중국은 지난 8월 머스크, 코스코, 하팍로이드 등 6개 대형 컨테이너 선사들을 대상으로 북미 항로에서 운임 동향 조사를 실시했다. 미국 법무부도 선사들의 선박 투입 축소에 대해 담합행위가 아닌지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나서 높은 운임을 받는 해운사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중국, 미국은 글로벌 해운업계에 운임 인상을 담합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는 상황인데, 우리 정부는 HMM의 빠른 성장을 생각해 높은 운임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다"고 말했다.

또다른 수출업체 관계자는 "정부는 ‘해운사 살리기’에만 초점을 맞춰 수출업체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다"며 "수출 기업이 무너지만 해운사도 위기를 맞고 국가경제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소영 기자(seenru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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